본문 바로가기

시마즈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2차 조슈 정벌(2) 사카모토 료마, 삿쵸 동맹을 성공시키다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2차 조슈 정벌(2)사카모토 료마, 삿쵸 동맹을 성공시키다 게이오 2년(1866년) 1월 21일, 조슈번의 카츠라 코고로우(桂小五郎)와 사츠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가,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의 중개에 의해 회견해, 삿초 동맹이 성립되었습니다. 이것을 기념해 일본에서는 이 날을 '라이벌의 날'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게이오 원년(1865년) 5월 1일, 사이고 키치노스케(西郷吉之助)와 고마츠 다테와키(小松帯刀)와 함께, 사츠마번의 배고쵸우마루(胡蝶丸)을 타 가고시마로 간 사카모토 료마는 그들에게서, 실은 사츠마가 막부의 조슈 정벌에 반대하고 있다는 것이나 조슈와의 화해를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2년전의 분큐 3년(1863년)에 발발한 8월 18일의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조슈번의 상경, 긴몬의 변 발발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조슈번의 상경, 긴몬의 변 발발 겐지 원년(1864년) 7월 19일, 8월 18일의 정변으로 내려진 처분의 철회를 요구해, 조슈번이 고쇼로 밀려 들었기 때문에, 사츠마번이나 아이즈번과 교전하게 되었으니, 이것이 긴몬의 변(禁門の変)입니다. 페리의 내항의 압력에 개국을 한 막부와 어디까지나 양이를 결행하고 싶은 조정과, 존왕양이론의 선봉을 선 것이 조슈번입니다. 조정 내의 양이파의 신뢰를 받아 고쇼에도 세력을 폈던 조슈번이었지만, 8월 18일의 정변으로 사태는 일변합니다.(8월 18일의 정변) 공무합체파의 공경에 의한 쿠데타에 의해, 양이파인 산조 사네토미와 함께, 조슈번은 고쇼에서 내쫓아져 정계에서도 일소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상황을 타개하려고, 은밀하게 공무합체파의 중심 인물의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쇼 전쟁(4) 영일회담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사츠에이센쇼 전쟁(4) 영일회담 분큐 3년(1863년) 9월 28일, 제1회 사츠에이센쇼 평화 회담이, 요코하마의 영국 공사관에서 열렸습니다. 분큐 2년년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으로 인해 영국은 범인의 인도와 배상금의 지불을 요구해, 기함 유리아라스호 이하 7척의 영국 함대가 가고시마로 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사츠마번을 다스리던 시마즈 하사미츠도, 아들인 번주 시마즈 타다요시도 범인을 인도할 생각도, 배상금도 건네줄 생각도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7월 1일에는, 수박 판매 결사대를 파견해 전투 태세에 들어갑니다.(수팍판매 결사대) 이로 인해 일어난 것이 사츠에이센쇼 전쟁입니다. 3일간 걸쳤지만, 애초에 교섭이 주 목적으로 별다른 전쟁 준비를 하지 않았던 영국측..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쇼 전쟁(2) 사츠에이센쇼 전쟁 발발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사츠에이센쇼 전쟁(2) 사츠에이센쇼 전쟁 발발 분큐 3년(1863년) 7월 2일, 가고시마 만에 정박중이던 사츠마 번의 기선을 나포한 영국 함대를 향해 사츠마 번이 포격을 개시해 일간에 걸쳐 전개되는 사츠에이센쇼 전쟁이 발발했습니다. 사츠마 번의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의 행렬을 방해한 영국인을 살해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 범인의 인도와 배상금의 지불을 계속 무시하는 사츠마 번에, 인내심의 한계를 느낀 영국 공사 대리 존 닐은 기함 유리아라스호이하 7척의 영국 함대를 인솔하고, 직접교섭을 위해 가고시마 만으로 다가옵니다. '수박 매도 결사대'를 만들어 함대를 탈취하려 했던 사츠마번측의 행동에 인내심이 끊어진 닐은 함대 사령관인 아우구스트 쿠퍼에 강경 수단을 취하도록 명령을..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츠에이센소 전쟁(1) 영국이 사츠마에 대한 강공세 결정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사츠에이센소 전쟁(1) 영국이 사츠마에 대한 강공세 결정 분큐 3년(1863년) 7월 1일, 영국 공사 대리 닐이, 가고시마 만에 정박중이던 영국 함대를 이끄는 쿠퍼 제독에게 세츠에이센쇼 전쟁을 명령했습니다. 전년 8월에 일어난 나마무기 사건(나마무기 사건), 페리의 외국 함선 내항(페리의 내항)에 의해, 길게 닫고 있던 쇄국의 문을 연 막부는 안세이의 대 옥사(안세이의 대 옥사)를 일으켜, 개국에 반대하는 존왕양이파를 탄압한 이이 나오스케는 사쿠라다몬 밖의 변(사쿠라다몬 밖의 변)으로 살해된 뒤, 관동 일대에서는 존왕양이파에 의한 외국인 살상 사건이나, 외국 공사관 습격 사건등이 다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일어난 것이 나마무기 사건입니다.(나마무기 사건) 에도를 출발해 교토로..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시마즈를 바꾼 나라무기 사건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시마즈를 바꾼 나라무기 사건 분큐 2년(1862년) 8월 21일, 요코하마에서 나마무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존왕양이파를 힘으로 억누르고 있던 다이로우 이이 나오스케가 사쿠라다몬의 변(사쿠라다몬의 변)으로 암살되어 드디어 막부의 체제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막부는 어떻게든 체제를 고쳐 세우려고, 조정과 막부가 협력하고 정치를 실시하는 '공무합체 운동'의 기치를 내겁니다. 그 상징이 14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와 고우메이덴노의 여동생 가즈노미야의 결혼이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추진하고 있던 것이, 사츠마 번의 은거한 번주 시마즈 히사미츠(島津久光)입니다. 그리고 다이묘를 일정기간 교대로 머무르게 하거나, 서양식 군대의 채용 등 분큐의 개혁이라 불리는 막부의 신체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큐슈의 패자, 시마즈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큐슈의 패자, 시마즈 가문 전국시대의 큐슈는 류조지, 시마즈, 오오토모 세 가문이 난립하는 마치 삼국지와 같은 형태였습니다. 그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전국의 큐슈를 통일하려 한 것은 다름아닌 시마즈 가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천하를 통일해 가는 하시바 히데요시의 큐슈정벌에서 살아남을 수는 없었습니다. 시마즈 가문의 성립 시마즈 가문의 출자에는 코레무네(惟宗), 미나모토 (源), 후지와라(藤原)의 후예라는 세 가지 설이 있습니다. 하지만 미나모토나 후지와라 같은 경우는 단지 자신의 출자를 미화하기 위해서 같다 붙인 것입니다. 실제로는 코레무네 가문의 출자라는 것이 정설입니다. 그들이 시마즈 장(島津庄)을 하사받아 스스로 '시마즈'라 칭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시마즈는 미나모토노 요리모..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마즈 이에히사의 류구 침공, 류구국 멸망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시마즈 이에히사의 류구 침공, 류구국 멸망하다 게이쵸 14년(1609년) 4월 5일, 사츠마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가 부하인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를 총대장으로 류구(琉球)에 침공합니다. 쇼 네이(尚寧)가 항복해, 류구국(琉球国)은 멸망했습니다. 류큐 왕조의 혈통은 15세기 경에 처음으로 류큐 전국을 통일했다고 하는 쇼(尚)에서 시작됩니다. 그 이후 그의 혈통은 7대를 이어지다가, 분메이 2년(1470년)에 쇼 엔(尚円; 内間金丸)이 수립하는 제 '2대 쇼'로 나누어집니다. '1대 쇼'의 제6대 왕 쇼 다이큐(尚泰久)의 신하로 출세한 엔이, 제7대 쇼 토쿠(尚徳)가 죽은 것을 계기로 정권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 '2대 쇼'의 6대 쇼 에이(尚永)의 뒤를 이을 아이가 없었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세키가하라 전투(17) 적도 놀래키다! 시마즈의 배진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세키가하라 전투(17) 적도 놀래키다! 시마즈의 배진 게이쵸5년(1600년) 9월 16일, 세키가하라 전장에서 탈출한 시마즈 요시히로가 토키무라(時村)에 도착해 미즈구치(水口)를 거쳐, 오사카로 향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시마즈대는 끝까지 서군으로서 전장에 남아있었습니다. 시마즈대는, 전투의 한중간, 완전히 군사를 움직이지 않아, 보다 모산 이시다 미쓰나리가 사자를 보내고 참전을 재촉해도, '우리들은, 우리들의 싸움을 한다.'라며 끝까지 관망했습니다. 시마즈대를 인솔하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는, 형 요시히사와 두 명의 동생 토시히사(歳久), 이에히사(家久)와 함께 '시마즈4 형제'로 알려진 사츠마의 무장입니다. 원래 시마즈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맹세를 주고 받은 사이여서,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기모쓰기가, 거짓전투로 멸망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기모쓰기가, 거짓전투로 멸망하다 에이로쿠4년(1561년) 12월 21일, 교전중이었던 시마즈(島津)가와 기모쓰기(肝付)가가 일단 화해가 성립했습니다. 전국시대의 큐슈라고 말하면 오오우치, 오오토모 그리고 시마즈 3가의 '큐슈 삼국지'가 유명합니다. 하지만 이때는 아직 삼국으로 갈라지기 전이고, 남큐슈에서는 사츠마(薩摩)의 시마즈가와 후유가(日向)의 이토가라고 하는 두 세력이 영유권을 둘러싸고 분쟁을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 양자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는 오스미(大隅)를 지배하고 있던 것이 기모쓰키가 였습니다. 기모쓰기 17대 당주는 기모쓰기 요시카네(肝付良兼), 시마즈의 당주는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 그리고 이토가의 당주는 이토 요시스게(伊東義佑)였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강한 세력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