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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로마치 막부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시카가 가문 내의 분쟁, 간오의 요란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아시카가 가문 내의 분쟁, 간오의 요란 쇼헤이 5년, 간오 원년(1350년) 10월 26일, 형 아시카가 타카우지와 대립하고 있던 남동생 나오요시가 실각의 발단이 된 고노모로나오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간오의 요란(観応の擾乱)'이 발발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군의 우두머리와 정치의 우두머리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군사담당은 형인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정치담당은 동생인 아시카가 나오요시가 맡고 있었습니다. 이들 형제의 성격과 상하관계를 고려해 정한 이 양두체제는 올바르게 기능해, 중흥기를 맏이 하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가마쿠라막부도 그랬던 것처럼, 두 영웅이 양립하는 것은 꽤 어려운 것으로, 역시 이 두 명도 서서히 균열이 생겻습니다. 특히 나오요시는 타카우지의 집사인..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쿠노스키 가문 멸망, 시죠나와테 전투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쿠노스키 가문 멸망, 시죠나와테 전투 쇼헤이 3년 죠와4년(1348년) 1월 5일, 남북조 동란의 시죠나와테 전투(四条畷の戦い)에서 패배해, 남조 측의 쿠스노키 마사유키(楠木正行)등이 서로 찔러 죽어 할복 했습니다. 겐코 3년(1333년) 5월에 ,함께 가마쿠라막부를 넘어뜨렸음에도, 고다이고 덴노의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에 반발한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미나토가와 전투(미나토가와 전투)로 닛타 요시사다와 구스노키 마사시게를 넘어뜨려 교토로 쳐들어 갔습니다. 이에 고다이고덴노는 아들들을 요시사다에게 맡겨 북국으로 향하게 했습니다.(요시사다 북국으로 향하다), 결국 그는 기회를 봐 요시노로 탈출해 새로이 조정을 엽니다(남조 시작) 이 남조를 지지하는 무장 중 한 명이 바로 쿠스노키..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시카가 타카우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다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아시카가 타카우지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다 엔겐 3년(레키오우 원년 1338년) 8월 11일,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북조에서 정이 대장군(=쇼군)에 임명되었습니다. 아시카가는 야와타 타로우(八幡太郎) 불린 미나모토노 요시이에(源義家)의 손자 요시아스(義康)가 시모쓰케국 아시카가에 산 것을 계기로, 성을 아시카가로 한 것이 시작이었습니다. 겐페이 쟁란의 시대는, 그 요시아스의 아들인 요시카네(義兼)의 시대에, 이즈에서 군사를 일으킴 한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따라, 대 타이라전에서 무공을 세웠고, 그 호조 도키마사의 딸과 결혼해, 가마쿠라 막부에서도 경의를 표해지는 집안이었습니다. 그런 아시카가 본가의 혈통의 당주 아시카가 사다우지(足利貞氏)의 차남으로 가겐 3년(1305년)에 태어난 타..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키이에의 승리, 아오노하라 전투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아키이에의 승리, 아오노하라 전투 엔겐 3년, 겐무5년(1338년) 1월 28일 추격 하는 아시카가군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요격 한 아오노하라 전투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문신 중심으로 진행되어, 무사를 무시한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에 반발해, 고다이고덴노에 반기를 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배해 고다이고덴노측은 교토를 빼았깁니다.(교토전투) 결국 고다이고덴노가 교토로 돌아오며 갈등을 인단락됩니다. 하지만, 닛타 요시사다는 고다이고덴노의 밀명을 받고 북국으로 향했습니다. (요시사다 북국을 향하다) 그리고 아시카가군은 남조의 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아키이에는 오슈에서 군사를 일으켜 가마쿠라를 정복하고, 교토로 향합니다.(아키이에 상경) 엔겐 3년, 겐무 5년(133..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가마쿠라 점령뒤 상경 시작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기타바타케 아키이에, 가마쿠라 점령뒤 상경 시작 엔겐 3년, 겐무5년(1338년) 1월 8일, 전년의 말미에 가마쿠라를 공략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北畠顕家)가 교토를 목표로 해 가마쿠라를 출발했습니다. 너무나 문신 중심으로 진행되어, 무사를 무시한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에 반발해, 고다이고덴노에 반기를 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배해 고다이고덴노측은 교토를 빼았깁니다.(교토전투) 결국 고다이고덴노가 교토로 돌아오며 갈등을 인단락됩니다. 하지만, 닛타 요시사다는 고다이고덴노의 밀명을 받고 북국으로 향했습니다. (요시사다 북국을 향하다) 그리고 아시카가군은 남조의 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오슈에서 고다이고덴노를 돕기 위해 먼길을 달려 온 이가 바로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입니다. ..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쿠노스키 마사시게, 마사유키 사쿠라이의 이별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쿠노스키 마사시게, 마사유키 사쿠라이의 이별 엔겐 원년, 겐무 3년(1336년) 5월 16일, 고다이고 덴노의 명령을 받은 구스노키 마사시게가, 효고를 향해 출진했습니다. 함께 가마쿠라막부를 무너뜨렸지만(가마쿠라막부 멸망), 고다이고덴노가 연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에 반발해 갈등이 시작됩니다. 결국, 둘은 싸우게 되어 큐슈로 도망쳤던 타카우지는 재기해 교토로 향합니다.(타카우지 상경) 연전연패하는 덴노군에 당황한 고다이고덴노는 구노스키 마사시게를 불렀습니다. 마사시게는 교토로 적을 유인하는 작전을 제의합니다만, 덴노가 정의롭지 못하게 도망칠 수 없다며 기각합니다. 이에 마사시게는 죽음을 각오해 겐무 3년 5월 15일 요시사다가 있는 효고로 향합니다. 이윽고 카와치와의 갈림길이..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시카가 타카우지, 타자이부에서 상경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아시카가 타카우지, 타자이부에서 상경 엔겐 원년, 겐무 3년(1336년) 4월 26일, 타타하마 전투에서 승리한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교토를 목표로 해 타자이부(大宰府)를 출발했습니다. 함께 가마쿠라막부를 무너뜨렸지만(가마쿠라막부 멸망), 고다이고덴노가 연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에 반발하는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호조 잔당 토벌을 위해서 가마쿠라에 머문 채로 교토에는 돌아오지 않고, 반대로 고다이고덴노에게서 파견된 닛타 요시사다를 하코네, 타케노시타 전투로(하코네, 타케노시타 전투), 닛타군을 추격 하면서 교토로 쳐들어갔습니다. 도중에 참전한 토호쿠의 무사들을 가세해 80만이라는 대군이 되어 교토로 쳐들어가는 아시카가군에 대해, 고다이고덴노는 히에이잔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여기서..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모리요시 친왕, 암살당하다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모리요시 친왕, 암살당하다 겐무2년(1335년) 7월 23일, 가마쿠라에 유폐중이던 모리요시 친왕을 아시카가 타카우지의 남동생 나오요시(直義)가 암살했습니다. 오오토우노미야 모리요시 친왕(大搭宮護良親王)은 겐무의 신정의 제 96대 고다이덴노의 황태자입니다. 처음은 히에이잔렌라쿠지에서 승려가 되어 출가한 뒤 소운법 친왕(尊雲法親王)이라 자칭하고 텐다이자스(天台座主)가 되어 있었습니다만, 아버지 고다이고덴노가 타도 가마쿠라 막부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하자, 환속해 참전합니다. 그는 킨키 지방의 무사를 모아, 가마쿠라막부에 주목받아 자유로이 행동을 할 수 없는 아버지를 대신해, '함께 싸우자!'라고 영지를 연발해, 각지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고다이고덴노에게 협력..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나카센다이의 난 발발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나카센다이의 난 발발 겐무 2년(1335년) 7월 23일, 죽은 호조 다카토키의 아이 타카유키를 필두로 가마쿠라막부 부흥을 목표로 한 반란인 나카센다이의 란으로, 반란군이 가마쿠라를 점거했습니다. 막부군은 전면 항복했습니다만, 마음 속에 '막부 부활'의 뜻을 숨기는 사람이나, 간신히 소수로 탈출해 반란을 획책 하는 사람들은 남아있었습니다. 호조 다카토키에게는 3명의 남자 아이가 있었습니다. 다카토키의 유우시(猶子)로 종가에 들어가 있던 하루토키(治時)는 7월 9일에 처형됩니다 친자인 장남 쿠니토키(邦時)는, 아버지에게서 '호조 재흥'의 꿈을 맡아 백부인 고다이 이인노 무네시게(五大院宗繁)에 맡겨집니다만, 그가 스스로의 보신을 위해서 쿠니코키를 팔았기 때문에 포박 되어 5월 28일.. 더보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와카사국 타라노쇼우 잇키 발발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와카사국 타라노쇼우 잇키 발발 겐무 원년(1334년) 8월 21일, 와카사국 타라노쇼우(太良荘)에서, 백성 59명이, 지도우(地頭) 대관의 교대를 요구해 서약문을 제출하고, 잇키를 일으켰습니다. '우는 아니도 지도우에는 그친다'라고 할 정도로 가마쿠라 시대때부터 큰 권력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전답에 이런저런이유를 붙여 새로운 세금을 징수하거나 용수를 이용하려면 지불을 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습니다. 이럴때 농민들은 로쿠하라탄다이에 호소하고 있었습니다만, 로쿠하라탄다이가 멸망하고 나서는 더욱 치안이 나빠져 약탈행위가 공공연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와키부쿠로(脇袋)라는 지도우가 새로 부임했지만, 그는 장원내의 사람들을 마음대로 부리며 자신의 집을 짓는 등의 학정을 거듭해 겐무원년..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