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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키이에의 승리, 아오노하라 전투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키이에의 승리, 아오노하라 전투



 엔겐 3년, 겐무5년(1338년) 1월 28일 추격 하는 아시카가군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요격 한 아오노하라 전투가 있었습니다.


 너무나 문신 중심으로 진행되어, 무사를 무시한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에 반발해, 고다이고덴노에 반기를 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배해 고다이고덴노측은 교토를 빼았깁니다.(교토전투) 결국 고다이고덴노가 교토로 돌아오며 갈등을 인단락됩니다. 하지만, 닛타 요시사다는 고다이고덴노의 밀명을 받고 북국으로 향했습니다. (요시사다 북국을 향하다) 그리고 아시카가군은 남조의 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한편, 아키이에는 오슈에서 군사를 일으켜 가마쿠라를 정복하고, 교토로 향합니다.(아키이에 상경)


 엔겐 3년, 겐무 5년(1338년) 1월 타카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요시아키라(足利義詮)가 있는 가마쿠라를 제압한 아키이에는 전군을 인솔해 토카이도를 통해 교토를 목표로 합니다. 이 때, 북조의 지도자인 타카우지는 호쿠리쿠에서 분전 하는 요시사다를 쫓아 기타바타케군에 관심을 가질 여유는 없었습니다. 일단 가마쿠라를 버리고 도주한 요시아키라도 가만이 있을 리가 없고, 기타바타케세가 가마쿠라를 출발하자 마자 공격해 곧 바로 가마쿠라를 탈환해, 후방에서 추격을 개시했습니다. 이윽고 1월 20일 미노까지 진군하자, 추격의 소식을 들은 아키이에는 추격을 따돌리는 것을 선결하기로 해 요격을 결의하고 오와리 근처에서 결전을 하려 합니다.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한편, 추격하는 아시카가군에는 미노의 수호 토키 요리토우(土岐頼遠)가 가세해, 그 땅의 지리적 이점을 살린 작전을 전개하기로 합니다. 군을 몇 부대로 나누어 배치해, 빈틈 없이 기타바타케군에 공격을 시작 합니다. 엎치락 뒤치락하며 당분간,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는 싸움이 전개되었습니다. 이윽고 엔겐 3년, 겐무 5년(1338년) 1월 28일 미노 아오노하라에서, 이 추격전은 최종 결전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실은 아시카가군이 꽤 불리했습니다. 요시아키라는 군사를 분산시키고, 여기저기서 전투를 펼치고 있었습니다. 그가 인솔하는 군세는 불과 1,000기 였습니다. 한편, 기타바타케 아키이에가 이쓰는 군세는 무려 6만여기 였지요.



아오노하라 전투



 엄선의 정예를 모아 과감하게 기타바타케군에 공격을 하는 아시카가군은 '마지막 1기가 될 때까지 물러나지 말아라!'라고, 서로 격려하며 분전 합니다.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윽고, 요시아키라도 부상해 부득이 철퇴를 개시합니다. 이에 아오노하라 전투는 기타바타케군의 승리가 되었습니다. 이 패전의 소식을 전해 들은 교토의 타카우지는 기타바타케군이 이대로 오미를 통해 교토에 올 것이라고 생각해 고노우 모로야스(高師泰)나 사사키 도우요(佐々木道誉)등 5만의 군세를 파견해 미노와 오미의 경계선이 되는 쿠로지가와(黒地川)에서 진을 쳐, 기타바타케군을 요격하기로 했습니다.


 만약 여기서 패배해 아키이에가 오미에 들어가, 호쿠리쿠의 요시사다와 합류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타카우지에게도 큰 위기가 되는것입니다. 하지만 쿠로지가와에 아키이에가 나타나는 일은 없었습니다. 아키이에는 곧바로 오미에 가지 않고, 이세쪽으로 우회 해 나라로 향했습니다. 「태평기」에서는 이 우회 작전을, 닛타 요시사다와의 합류를 싫어했기 때문에라고 합니다. 요시사다와 타카우지의 라이벌의 이미지가 강했기에 만약 아키이에가 합류해 승리해도, '요시사다의 승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고도 다양한 견해가 있습니다만, 아무튼 둘은 합류하지 않았지요. 결국 이것이 남북조의 동란의 큰 분기점이 됩니다. 그리고 이 소식을 들은 타카우지역시 움직이기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