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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남조의 대패, 카네자키성 공방전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남조의 대패, 카네자키성 공방전



 엔겐 2년, 겐무4년(1337년) 3월 6일, 닛타 요시사다가 인솔하는 남조군이 농성하는 에츠젠 카네자키성(金崎城)이 낙성되어 츠네요시 친왕(恒良親王)이 생포되고 타카요시 친왕(尊良親王)이 할복 했습니다.


 너무나 문신 중심으로 진행되어, 무사를 무시한 겐무의 신정(겐무의 신정)에 반발해, 고다이고덴노에 반기를 든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패배해 고다이고덴노측은 교토를 빼았깁니다.(교토전투) 결국 고다이고덴노가 교토로 돌아오며 갈등을 인단락됩니다. 하지만, 닛타 요시사다는 고다이고덴노의 밀명을 받고 북국으로 향했습니다. (요시사다 북국을 향하다) 그리고 아시카가군은 남조의 성들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카네자키성



 요시사다는 적군을 분산하는 작전을 시작합니다. 총사령관이 되는 그는 츠네요시 친왕(恒良親王)과 타카나가 친왕(尊良親王)을 지키기 위해 카네자키성에 머물며, 아들인 요시아키(義顕)를 에치고에, 남동생 와키야 요시스케(脇屋義助)를 우류(瓜生) 형제가 지키는 소마산성(杣山城)으로 파견합니다. 이러는 사이에 아시카가의 대군이 카네자키성을 포위해 그 후 당분간, 일진일퇴의 공방이 전개됩니다. 고다이고덴노는 유폐처에서 탈출해 요시노로 피해(남조 시작), 그곳에는 구노스키 마사시게의 아들 마사유키 등의 남조의 충신도 잇달아 도착했습니다. 한편, 아시카가군의 공격을 받은 카네자키성에서는 농성도 시간문제가 되었습니다. 바다에 접한 카네자키성에서는, 처음에는 강에서 물고기를 낚거나 해조를 채집해 굶주림을 견디고 있었습니다만, 농성도 반년 이상 계속 되자 이제 그런 소량의 식량으로는 해 나갈 수 없을 만큼의 기아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윽고, 황족의 말이나 무장들의 애마까지 눈물을 머금고 식량으로 쓰며 버티며 희망을 잃어가던 나날에, 닛타 요시사다, 와키야 요시스케 형제는 은밀히 카네자키성을 탈출해, 소마산성으로 가 지원을 요청하려합니다. 그러나, 카네자키성이 포위된 이후, 요시스케의 아들 타카하루(義治)가 대장이 되어 우류 형제와 함께, 어떻게든 카네자키성을 지원할 수 있도록 움직이고 있던 소마산성이라고 해도 타카우지군과의 전투 안에서 맏형인 우류우 우타모츠(瓜生保)를 잃었습니다. 이제 와서는 소마산성에 남아 있는 군사가 지원에 향한다고 해도, 그 수는 500여기정도였습니다. 10만의 군사(아마 과장이겠지만)에게 둘러싸인 카네자키성을 구원할 수 있을 정도의 군사도 없었습니다.



카네자키성의 구조



 겐무4년(연원2년 1337년) 3월 6일, 그 기아 상태를 예측한 아시카가군이 카네자키성에 노도와 같이 쳐들어갔습니다. 카네자키성을 지키는 것은 소마산성으로 향한 아버지의 대신 총사령관을 맡은 장남 닛타 요시아키였습니다. 피로로 병사들은 제대로 화살을 쏘지도 못했으며 순신각에 산노마루, 니노마루가 점령되었습니다.  이렇게된 이상, 황태자(친왕)들을 탈출시키기로 했습니다. 그 사이에 니노마루에서 코우노 빈고노카미(河野備後守)는 자신의 허벅지를 잘라내, 20명 남짓의 수하 무장들에게 식량으로 줬습니다. 그들은 그뒤 1시간 정도, 쳐들어오는 적을 막은 후 거의 전원이 깊은 상처를 입은 뒤에 그 자리에서 장렬히 할복했습니다. 그 사이, 성내에서는 요시아키는 할복의 각오를 고해 두 명의 황태자에게 탈출을 권합니다. 이 때, 타카요시 친왕 '동포를 버려 도망치는 일은 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결국 츠네요시 친왕만 탈출하게 됩니다.


 그 때문에 츠네요시 친왕 한 명만, 기비샤(気比社)의 대궁사(大宮司)인 키비 나리하루(気比斉晴)가 작은 배에 싣고 바다를 건너 카부키포(蕪木の浦)의 어부에 맡겼다고 합니다. 츠네요시 친왕이 떠난 성에서는 그 각오는 있지만, 할복의 방법을 모르는 타카요시 친왕이 요시아키에게 묻자, 그는 직접 할복해 모범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츠네요시 친왕은 곧 아시카가군에게 잡혀버립니다. 아시카가 측은 그에게 닛타 요시사다, 와키야 요시스케 형제의 목이 없는 일을 물었습니다만, 츠네요시 친왕은 '각오를 결정해 할복했기에 화장했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대패에도 불구하고, 남북조의 쟁란은 아직 막 시작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