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시카가 가문 내의 분쟁, 간오의 요란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시카가 가문 내의 분쟁, 간오의 요란




 쇼헤이 5년, 간오 원년(1350년) 10월 26일, 형 아시카가 타카우지와 대립하고 있던 남동생 나오요시가 실각의 발단이 된 고노모로나오를 공격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간오의 요란(観応の擾乱)'이 발발했습니다. 


 무로마치 막부는 군의 우두머리와 정치의 우두머리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군사담당은 형인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정치담당은 동생인 아시카가 나오요시가 맡고 있었습니다. 이들 형제의 성격과 상하관계를 고려해 정한 이 양두체제는 올바르게 기능해, 중흥기를 맏이 하기도 했었습니다.



아시카가 타카우지



  하지만 가마쿠라막부도 그랬던 것처럼, 두 영웅이 양립하는 것은 꽤 어려운 것으로, 역시 이 두 명 서서히 균열이 생겻습니다. 특히 나오요시는 타카우지의 집사인 고노모로나오와 성격이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태평기(太平記)」에 의하면 고노모로나오는 이즈모의 수호 엔야 타카사다(塩冶高貞)의 부인에게 한 눈에 반했지만 거절당하자, '남편이 없어야 한다'며 타카사다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런 점들이 냉정한 정치가 나오요시에게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던 갈등이 표면화한 것이 장원 문제입니다. 귀족과의 대립을 막기 위해서 공가나 사찰의 영지인 장원은 무사의 지배와는 다른 것이라 주장한 나오요시와, 무공이 있는 무사에게 장원의 관리를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고모로나오의 갈등을 갈수록 깊어집니다. 죠와 3년(쇼헤이2년, 1347년), 남조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되었기에 나오요시는 부하인 호소카와 아키우지(細川顕氏)등을 파견합니다만, 그들은 패배해 버렸습니다. 반대로, 고모로나오는 남조군에 승리해 요시노에 쳐들어가 대승리를 거둡니다. 이 일로, 막부내에서의 고모로나오의 발언권이 강해진 일에 위기감을 안은 나오요시는 타카우지에게 고모로나오의 욕을 해 집사를 해임시켜 버립니다. 심지어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고모로나오는 즉시 무력으로도 나오요시를 공격하기로 합니다. 형인 타카우지 저택에 도망친 나오요시를 포위했습니다. 그러나 이 때는 나오요시가 출가해, 그 지위를 자신의 아들 요시아키라(義詮)에 양보한다고 하는 조건으로, 일건낙착  되었습니다. 어떻게든 반격 하려고 기회를 살피고 있던 참에, 큐슈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있는 나오요시의 조카 타다후유(直冬)가 타카우지가 출진해 부재중이던 교토로 향합니다. 쇼헤이 5년, 간오 원년(1350년) 10월 26일, 나오요시는 교토를 탈출해, 남조로 향합니다. 그리고 고모로나오를 토벌하기 위해 군사를 일으킵니다. 



아시카가 요시나오



 그리고 이것을 위해 '요시나오 토벌령'을 발하니,이것이 '간오의 요란'의 발발입니다. 남조를 아군으로 한 요시나오는 강력했습니다. 간오 2년 (쇼헤이 5년 1351년) 고모로나오를 무찔러 그들 일족을 멸망시켜 버립니다. 그 뒤에 그는 약삭바르게 정계에 복귀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타카우지와 요시아키라가 탈출 해, 남조와 화목해 '요시나오 토벌령'을 내립니다. 이에 요시나오가 도망치자, 타카우지는 요시아키라에게 정치를 맡기고 동생을 쫓습니다. 요시나오는 호쿠리쿠를 거쳐 11월에 가마쿠라에 들어갑니다. 반면, 타카우지는 토카이도를 통해 요시나오군을 물리쳤습니다.


 쇼헤이 6년, 간오 3년(1352년) 정월에 항복한 요시나오는 1개월 뒤의 2월 26일에 병사합니다. 공식기록으론 황달 이라지만, 실제로는 독살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아무튼 이 일시적인 남북조의 합일을 '쇼헤이의 통일'이라고 부릅니다만, 타카우지가 남조에 항복한 형태이기에, 남조 주체로 통일된 것으로 다시 남북조는 갈라서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