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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2) 일본의 게르니카 히라노고우 방화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2) 일본의 게르니카 히라노고우 방화 게이쵸 19년(1614년) 11월 5일, 오사카측의 스스키다 하야토(薄田隼人)가 도쿠가와 측에 붙은 히라노고우(平野郷)에 불을 질러, 스에요시 요시코우(末吉吉康) 일족을 죽였습니다. 전국시대의 영민은 완전히 전투에 무관계한 일반인 이라고 할 수 없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투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각각의 마을이나 취락 단위로, 오사카 측에 서는지, 도쿠가와 측에 서는지를 결정해 은밀히 또는 노골적으로 지원했습니다. 오늘의 무대인 히라노고우는 해자와 토루로 둘러쌓인 환호 집락(環濠集落)이 되어, 사람들의 협의에 의한 규칙으로 자치와 자위가 행해진 자유 도시였습니다. 적극적으로 행해진 상업 활동에 의해, 전국..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10일, 사나다유키무라가 오오사카성에 입성해, 오사카성의 군의에 참것했습니다. 다음날인 10월 11일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출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히데요시의 군의가 있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황금 2백매, 은3 백관, 50만석의 영주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사카성 에 들어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유산은 있지만, 정작 전투를 할 줄 아는 무장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서군의 무장들은 대부분 죽거나 료닌이 되었었지요. 그래서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운에 히데요시 은고의 무장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히데요리의 기대와 다르게,..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사나다 유키무라, 쿠도산을 탈출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사나다 유키무라, 쿠도산을 탈출하다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9일, 세키가하라 전투의 뒤, 쿠도산(九度山)에 추방되고 있던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가 탈출해 오사카성으로 향했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 9월 15일의 세키가하라 전투는 반나절만에 결착납니다. 하지만 이때, 아이즈의 우에스기 정벌로 향한 사나다 마사유키, 노부유키, 유키무라 부자 3명입니다만, 시모우치 이누부시의 숙소에서 미쓰나리의 밀서를 받은 뒤에, 형인 노부유키는 동군으로 붙어 그대로 도쿠가와 히데타다(徳川秀忠)에 합류하고, 아버지 마사유키와 동생 유키무라는 서군에 붙어 거성인 시나노 우에다성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오야마에서 회군한 이야에스의 동군 중, 히데타다는 나카센도우에서 서쪽으로 향해 진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에 실패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기타기리 가쓰모토, 중재에 실패하다 7월 21일,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건립한 교토 호코지 종명에 트집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호코지 종명사건) 이에 도요토미 측은 분노하지만, 아직 전투의 준비가 되지 않습니다. 많이 남아있는 히데요시의 유산으로 료닌들을 고용해 무기의 준비도 시작하고는 있었습니다만, 조금만 더 시간을 벌고 싶었지요. 이에 도쿠가와 가문의 파이프역이기도 한 이바라키성(茨木城) 성주 가타기리 가쓰모토(片桐且元)가 변명을 위해 슨푸로 향했습니다. 가타기리 가쓰모토는 시즈가타케의 전투에서 그 이름을 달린 '시즈가타케 칠본창'(시즈가타케 전투)의 한 명입니다. 히데요시의 사후는 히데요리의 모리야꾸(傅役:스승역)를 맡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히데요리 산하였기에 서군에 섰습니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도요토미 축출의 서막, 호코지 종명사건이 일어나다 게이쵸 19년(1614년) 7월 21일, 오사카의 진의 발단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호코지 종명(鐘銘)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게이쵸5년(1600년)의 세키가하라의 전투(세키가하라 전투 발발)의 전후에는, '전투는 어디까지나 도요토미 가문의 내분이며, 도쿠가와 가문이 도요토미 가문을 멸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였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천하인 도요토미 가문에 모반을 꾀한 일이 되어, 동군의 무장들도 대부분 적이 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도쿠가와 이야에스는 도요토미히데요리와 게이쵸 16년(1611년)에 니죠성(二条城)에서 회견했습니다. 그 전후로 왠지, 세키가하라의 전투에서 동군으로 배신했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도쿠가와 히데타다, 또 다시 기리시탄 금지령을 내리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도쿠가와 히데타다, 또 다시 기리시탄 금지령을 내리다 게이쵸 18년(1613년) 12월 23일, 2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가 2번째 '기리시탄 금지령'을 냈습니다. 일본에 크리스트교가 전래된 것은, 텐분 18년(1549년)에 온 프란시스코 자비엘이었습니다.(남만신교의 전파) 하지만 이것은 선교사가 와서 본격적으로 전래된 것으로, 크리스트교 자체는 나라시대 전반에 일본에게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과 밀접한 관계에 있던 나라 중 하나인 중국에 크리스트교가 전래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635년 당나라 시대에 '페르시아에서 정식 전도사들이 수도인 장안에 와, 포교 활동을 하는 일을 인정받았다.'라고 하는 기록이 있어, 중국에서는 '경교(景教)' 라는 이름으로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카모토 다이하치 화형해 쳐해지다, 이야에스의 기리시탄 금지령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오카모토 다이하치 화형해 쳐해지다, 이야에스의 기리시탄 금지령 게이쵸 17년(1612년) 3월 21일, 혼다 마사즈미(本多正純)의 가신 오카모토 다이하치(岡本大八)가 화형에 처해져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기리시탄(크리스천)을 금지했습니다. 게이쵸 14년(1609년)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마카오에 기항하고 있던 일본의 무역선에 승선하고 있던 뱃사람들이, 포르투갈선의 선원들과 술집에서 말다툼을 해 큰 싸움의 끝에, 50명 정도의 뱃사람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일본의 무역선은 히젠 히노에번(日野江藩)의 배였습니다. 하지만 소식이 빠르지 않아 일본인들은 아직 이 사건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수개월의 뒤, 1척의 포르투갈 배가 나가사키에 들어 옵니다. 정확히 그 무렵, 다른 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시마즈 이에히사의 류구 침공, 류구국 멸망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시마즈 이에히사의 류구 침공, 류구국 멸망하다 게이쵸 14년(1609년) 4월 5일, 사츠마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가 부하인 가바야마 히사다카(樺山久高)를 총대장으로 류구(琉球)에 침공합니다. 쇼 네이(尚寧)가 항복해, 류구국(琉球国)은 멸망했습니다. 류큐 왕조의 혈통은 15세기 경에 처음으로 류큐 전국을 통일했다고 하는 쇼(尚)에서 시작됩니다. 그 이후 그의 혈통은 7대를 이어지다가, 분메이 2년(1470년)에 쇼 엔(尚円; 内間金丸)이 수립하는 제 '2대 쇼'로 나누어집니다. '1대 쇼'의 제6대 왕 쇼 다이큐(尚泰久)의 신하로 출세한 엔이, 제7대 쇼 토쿠(尚徳)가 죽은 것을 계기로 정권을 찬탈한 것입니다. 그 '2대 쇼'의 6대 쇼 에이(尚永)의 뒤를 이을 아이가 없었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이야에스의 상경요청을 히데요리가 거부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이야에스의 상경요청을 히데요리가 거부하다 게이쵸10년(1605년) 5월 10일,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리(豊臣秀頼)에게 상경을 재촉했으나 히데요리가 이것을 거부했습니다. 세키가하라의 전투는 게이쵸5년(1600년)이고, 오사카의 진의 발발이 게이쵸 20년(1615년)입니다. 이 사이에 도요토미와 도쿠가와 사이에는 미묘한 기류가 흘렀습니다. 지금에야 도쿠가와가 실권을 잡은 세키가하라를 엄청난 분수령으로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도요토미 가문 내에 실권을 누가 잡을 것이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오대로 중 가장 큰 힘을 가졌음에도, 직접 전투를 일으키지는 못하고 이시다 미쓰나리를 도발한 것입니다. 만약 이야에스가 야욕을 보였다면, 가토 기요마사등 도요토미 은고의 무장이 그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다테와 우에스기의 싸움, 마츠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다테와 우에스기의 싸움, 마츠가와 전투 게이쵸6년(1601년) 4월 26일, 시라이시성(白石城)을 출진한 다테 마사무네와 맞아 싸우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무장등이 부딪친 마츠가와 전투(松川の戦い)가 있었습니다. 세키가하라 전투와 같은 날에, 서군에 속하는 우에스기 카게카츠의 참모 나오에 키네츠구가 동군에 속하는 모가미 요시아키의 영지로 침공해 토호쿠의 세키가하라라고 불리는 하세도우 전투(하세도우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천하 판가르는 세키가하라가, 불과 반나절에 결착이 나 버립니다. 이에 부득이 하세도우성을 점령하지 못한 채, 우에스기군은 요네자와로 귀환하게 됩니다. 그러나, 토호쿠에 있어 동군은 모가미만이 아닙니다. 사실 모가미라면 우에스기의 적수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