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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문화편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 센고쿠 다이묘의 분국법 목록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센고쿠 다이묘의 분국법 목록 센고쿠 다이묘는 자신의 영지를 통치하기위해 여러가지 분국법(分国法)을 제정하였습니다. 이러한 분국법의 지정은 영지를 다스리는데에 아주 중요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중요한 만큼 제정하는 일이 쉽지많은 않았습니다. 분국법의 시행으로 손해를 보거나, 다이묘의 권력 강화를 막으려는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사쿠라 타카카게 조조(朝倉孝景条々) 아사쿠라 토시카게 십칠개조(朝倉敏景十七箇条)라고도 합니다. 에치젠의 센고쿠 다이묘 아사쿠라 타카카게가 제정한 분국법입니다. 아사쿠라 가문은 대대로 숙로(宿老)를 능력본위로 인재를 등용하는 일이나, 이치죠타니(一乗谷)에 가신이 모여 거주하도록 하는것 등을 정하고 있었습니다. 또 일만필(一万疋)의 명도를 살 돈이 있으면 백..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센고쿠 다이묘의 출자는 얼마나 중요했는가?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센고쿠 다이묘의 출자는 얼마나 중요했는가? 센고쿠 다이묘는 영지를 유지하고, 군비를 갖추고, 외교를 하는 것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출자를 명확히 하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센고쿠 다이묘에는 다양한 출자가 있었습니다.(센고쿠 다이묘의 출자) 고쿠시나 슈고에서 다이묘가 된 경우, 크게 봐서 슈고다이까지는 그래도 출자에 자신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토호나 출신이 명확지 않은 경우에는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인지도 몰랐기에 주변국들과 가신들, 더 나아가 영민들의 신망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계도가 계보를 조작하여 혈통의 고귀함을 강조하려 했습니다. 장사치에서 센고쿠 다이묘까지 오른 호조 소운은 자신의 출신을 이세의 세키(関)이며 이세 헤이시(伊勢平)와 동족이었다고 말하고..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센고쿠 다이묘는 어떻게 출현했을까?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센고쿠 다이묘는 어떻게 출현했을까? 무로마치 말기, 즉 전국시대의 무가사회에서는 실력에 따른 하극상의 풍조가 만연했습니다. 중앙에서는 무가를 이끌던 쇼군 아시카가 가문은 이미 힘을 잃고 영락해 버렸습니다. 또한 관동 지방에서도 관동 쿠보 아시카가를 몰락하고 있었습니다. 전통적인 권위가 흔들리며 이들을 없애고 그 자리를 차지하는 풍조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것이 다름아닌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입니다. 슈고(수호)에서 센고쿠 다이묘로 사츠마의 시마즈, 코난의 롯카쿠, 와카사의 다케다, 스루가의 이마가와, 가이의 다케다는 슈고 다이묘(守護大名)가 센고쿠 다이묘로 발전한 경우입니다. 슈고란 일본의 막부 시대에 쇼군에 의해 지방에 파견되는 지방관을 말합니다. 미..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 무사에 대한 보상(3) 다기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무사에 대한 보상(3) 다기 전국시대에 접어들어 새로이 무사에게 보상으로 주어진 것이 다름아닌 '다기'입니다. 이것은 전국의 패왕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서 퍼진것 입니다. 노부나가는 사카이의 상인 이마이 소큐(今井宗久)를 만나 '다도'를 체험한 이래, 완전히 다도에 중독 되었습니다. 노부나가으 취미인데다, 다도를 통해 외교 등 여러가지 일을 논의할 수 있었던 것으로, 다도는 크게 유행하였습니다. 이 뒤로 전투의 은상으로 다도에 사용하는 '다기'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노부나가는 '명기사냥'이라고 불릴 만큼 대규모 명물 찻그릇의 수집을 실시해, 매우 고가의 다기 콜렉션을 부하에게 자랑하고, '만약 큰 공훈을 세우면, 이 안의 하나를 하사하겠다.'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부하도 고급 다기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 무사에 대한 보상(2) 칸죠(感状)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무사에 대한 보상(2) 칸죠(感状)와 관위(官位) 저번에 지행(지행)에 대해서 알아보았습니다. 그렇지만 토지가 한정되어 있는 이상, 다른 포상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것은 금이거나 무기나 방어구, 재보등의 '물건'이 주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밖에 '칸죠'라고 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감사장' 또는 '상장'입니다. 전투의 활약등에 대한 다이묘의 감사와 격려의 말이 쓰여져 있는 서신으로, 이것을 받는 일은 명예를 존중하는 무사로서는 큰 훈장이 되었습니다. 그래봐야 종이 쪼가리이므로, 결국에는 지행을 받는것이 선호되기는 하였습니다. 그 밖에 '관위(官位)'라고 하는 것도 있었습니다. 이것은 조정(덴노)에게서 주어지는 공가(公家)로서의 '공식적인 신분'이며, 막부나 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 무사에 대한 보상(1) 지행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무사에 대한 보상(1) 지행 하급의 무사는 보통으로 영주에게서 녹봉(급료)을 받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큰 공훈을 세우거나 훈공을 거듭해 출세하면, 토지 일대를 지배할 권리인 '지행(知行: 치교)' 을 포상으로 받아, 그 토지의 '영주'나 '대관(代官)'이라는 직위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주어진 토지에서 얻을 수 있는 세금이나 연공은 그대로 그 무장의 수입이 되어, 명실공히 그 토지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층 더 공훈을 세워 가면 큰 영토를 지행으로 주어져 문자 그대로 '일국 일성의 주'에 오를 수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주어진 토지를 '지행지(知行地)'라고 해, 토지가 주어지는 일이나 그 토지를 지배하는 일을 '지행 한다(知行する)'라고 합니다. 이 영지가 일국에 이..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 전국시대의 화장은 어땠을까?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전국시대의 화장은 어땠을까? 전국시대 여성들이 아무리 힘들었더라도, 어디까지나 여성이었습니다. 여성 특유의 자신을 꾸미고자 하는 욕구는 그대로 있었지요. 또, 남자들도 전투 등에서 화장을 했었습니다. 오늘은 전국시대의 화장에 대해서 알아보려 합니다. 전국시대 전기의 화장 전국시대의 전기의 여성들은 맨 살갗의 색을 강조해 별로 백분(白粉)을 바르지 않는 화장법을 택했습니다. 한편, 남성들은 싸움에 임하는 무사들이 화장을 하는 풍조가 태어나 적에게 목을 잘려도 보기 흉하지 않게, 눈썹을 연필로 그리고, 얼굴에 백분을 발랐습니다. 우리가 흔히 일본 그림에서 보는 새하얀 무장들은 여기서 나온 것입니다. 개중에는 립스틱처럼 입술을 붉게 칠하거나 치아에 검은색으로 칠을 한 적도 있었던 것 같습..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 영주의 교양과목들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영주의 교양과목들 영주의 교양은 매우 다양했습니다. 와카(和歌), 렌카, 다도, 릿카(立花: 꽃꽃이), 향(香), 매사냥(鷹狩), 축국, 북, 소고, 북, 피리, 퉁소, 노래(謡), 노우(能), 춤, 바둑, 장기, 주사위, 요리 등은 전국시대의 문화인에게 요구된 교양입니다. 문신은 이러한 예능을 가업으로 하는 일도 있어, 영주에게 단가나 축국의 교수, 시모시(色紙: 와카등을 적는 종이)에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거나, 고전 서적의 매각등을 실시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례금을 수입으로 했다고 합니다.다도에 대해서는 따로 정리했었습니다.(무장의 취미, 다도) 매사냥을 취미로 즐기는 영주는 여럿 있었습니다.그 때문에, 매는 헌상품, 증답품이 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영주는 매사냥을 실시하는 것..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 전국시대 여성들의 삶, 여성들의 생활(2)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전국시대 여성들의 삶, 여성들의 생활(2) 전국시대 여성들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저번(전국시대 여성들의 삶(1))에 이어서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 알아 보려고 합니다. 여성의 이름은 가계도에 기재되지 않는다 실명이 판명되어 있는 전국시대의 여성들은, 특별한 에피소드가 있거나 관직의 등급을 받았기 때문에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전국시대의 여성은 실명이 알려지지 않은 것이 일반적입니다.여성은 머지않아 남의 집에 시집가 버리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일족으로 간주되지 않았습니다. 이름을 가르치는 것은 남편이 되는 남성만 당시의 여성들은, 실명을 경솔하게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실명을 가르치는 것은 남편이 되는 남성, 혹은 지극히 친한 상대만이었습니다. 옛날 일본에서는 남성이 여성의 이름을 묻는..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종교편; 신의 가르침과는 다른 폭력성, 남만신교(크리스트교) 일본 전국시대 종교편;신의 가르침과는 다른 폭력성, 남만신교(크리스트교) 기독교는 어떻게 일본에 쉽게 전파되었을까? 중국 정토종의 경전 「무량수경」은, 불교를 의역하기 위해 도교의 언어들을 사용했습니다. 이것과 같은 것이 전국시대 기독교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의 다양한 언어를 불교, 도교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이해가 쉽기 때문이지요. 유명한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엘은 일본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야지로(弥次郎)라고 하는 일본인이 자비엘의 통역을 했습니다. 야지로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에게 자비엘을 천축의 고승으로 소개합니다. 야지로가 자비엘을 승려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신도와 불교 밖에 종교를 몰랐던 것이기도 하지만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묵주와 염주,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