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문화편

일본 전국시대 종교편; 약학과 깊은 관계가 있던 도교 일본 전국시대 종교편;약학과 깊은 관계가 있던 도교 보통 일본 전국시대의 종교하면 불교나 남만신교(크리스트교)를 떠올리실 테지만, 도교도 만만치 않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위의 두 종교와의 차이라면 도교는 좀더 생활에 녹아 있었다는 겁니다. 특히 도교는 당시 의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더욱 중요했습니다. 전국시대의 도교, 도교와 소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영한 대저택 '쥬라쿠(聚楽)'는 도교의 경전 '상청제진장송(清諸真章頌)'에서 나오는 말을 따 이름 붙인 것입니다. 이렇게 도교는 전국시대의 곳곳에 녹아들어 있었습니다. '남방화덕성군신(南方火徳星君信)'은 불교와 도교가 융합된 종교 였습니다. 오행사상의 남방화덕을 신앙하고, 부활이나 극락왕생을 믿는 도교적인 측면이 강한 종교인데요,..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 전국시대 조정이 한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전국시대 조정이 한일들은 무엇이 있을까? 전국시대에 거의 유명무실이 되었다고는 하나, 덴노와 조정의 명분은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오늘은 덴노와 조정에서 어떤 일들을 했는지 알아보려 합니다. 칙사(勅使)와 어사(御使) 칙사는 덴노를 중심으로 조정의 총의를 모아 파견 되었습니다. 원래는 절과 신사에 파견된 쿠로우도(蔵人), 벤칸(弁官)을 가르키는 말이었습니다. 전국시대에는 격식 높은 무가에, 위문이나 전승 축하를 위해 파견되었습니다. 또 다이묘에게 물품을 하사하기 위한 쿠교(公卿)도 파견되었습니다. 치벌의 윤지(治罰の綸旨) 윤지는 덴노의 명령서로, 그 중 치벌의 윤지는 역적토벌의 명령입니다. 덴노가 쿠교, 쿠로우도, 벤칸을 시켜 작성시킵니다. 상황(전의 덴노가 양위한 뒤의 직위)가 작..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 오다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일조한 시로와리 일본 전국시대 정치편;오다노부나가의 천하통일에 일조한 시로와리 덴쇼 8년(1580년) 오다 노부나가가 츠츠이 준케이(筒井順慶)에게 츠츠이가의 본성 츠츠이성(筒井城)의 철거를 명했습니다. 교토에서 오다 노부나가를 만난 츠츠이 준케이는 노부나가에게서 코오리야마성만을 남기고 그 이외의 다이와의 성을 철거하라는 명을 들어 본성인 츠츠이성으로 돌아옵니다. 그 뒤에 노부나가는 셋츠, 카와치에 있는 성들도 철거하라는 명령을 내려, 준케이는 즉석에서 카와치로 향합니다. 그는 한달이 안되 성의 대부분을 철거해 코오리야마성에 돌아왔습니다. 타몬인 에이슌(多聞院 英俊)은 그의 저서 「타몬인일기(多聞院日記)」에서 이 성의 철거에 대해 매우 놀라움을 표현했는데, 지금봐도 경이로울 정도의 속도로 성의 철거가 이루어진 것이지요.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국시대 전장에서는 무엇을 먹었는가? 일본 전국시대;전국시대 전장에서는 무엇을 먹었는가? 사람이 사는데 빠질 수 없는 것이 의식주입니다. 이번에는 그 중에서 제가 개인적으로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식에 대해 알아보고자합니다. 요즘에야 아침, 점심, 저녁이라고 해서 하루에 세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원래 동양권에서는 아침과 저녁 두끼를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점심'이라는 단어 자체도 '마음'(심)에 '점'하나 찍으라는 뜻에서 왔다는 설도 있지요. 아무튼 전국시대에도 이는 마찬가지여서 보통 아침, 저녁 두끼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점심때쯤 한창 일을 하다 보니, 새참을 먹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이는 무사들도 마찬가지여서, 점심에 허기를 면할 정도로 음식을 먹곤 했습니다. 일본에서 점심이 일반화 된 것은 에도시대 때부터입니다..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국시대, 통신은 어떻게 했었을까? 일본 전국시대; 전국시대, 통신은 어떻게 했었을까?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정보입니다.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정보는 무엇보다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이 정보를 전달해봐야 속도에는 한계가 있지요. 이를 동구권에서는 '봉화'를 이용하여 전달했었습니다. 이미 아스카 시대에 강성한 해군을 지녔던 백제를 견재하기 위해서 동해쪽에 대마도를 경유하는 봉화를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경시 할 수 없네요. 전국시대도 역시 봉화를 잘 사용했었습니다. 이때는 이미 다양한 색상을 지닌 봉화를 마치 암호와 같이 사용했었다고 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은 후시미성은 봉화와 거울을 사용해 마치 모스부호처럼 정보를 전달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봉화에 잘 사용되는 것이 늑대의 대변이었습니다. 연기를 아주 잘 냈었다고..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 전국시대의 마을은 어땠을까? 마을의 구성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전국시대의 마을은 어땠을까? 마을의 구성 일본 전국시대는 보통 토지의 조세권를 걸고 싸웠기에, 마을은 전화를 빗겨갈 수도 있었습니다. 세금을 걷을 마을이 불타버려서야 주객전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건 일반론이고, 실제로는 마을을 불태워 보급을 끊어버리는 전략도 번번이 행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이런 전국시대의 마을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전국시대의 마을의 사람들은 연령에 따라 장로, 중로(中老), 젊은이, 아이들로 구분되었습니다. 아이들 아이들이 15살이 되면 '가타나사시(刀指)의 축(祝)'을 실시했습니다. 아명을 고쳐 성인의 이름을 자칭하고, 기모노역시 오비(帯)로 묶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칼이나 호신용 단도를 오비에 찻지요. 도는 유력자만이 가질 수 있었습니다. 젊은이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 전국시대 여성들의 삶, 여성들의 생활(1)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전국시대 여성들의 삶, 여성들의 생활(1) 전국시대 여성들의 생활은 어땠을까요? 보통 전쟁이 활발히 일어날 때는 여성과 아이들의 인권이 철저하게 무시당하기 마련입니다. 게다가 서양식 역사분류로는 중세에 들어가는 일본 전국시대에 여성의 삶이란 그리 좋지 못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시대이기에 오히려 더 당당히 살아가는 여성들도 있었습니다. 이제 신분에 따라 전국시대 여성들의 삶을 살펴 보겠습니다. 공주들의 삶 공주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운명이 어느정도 정해져 있었습니다. 당주직을 계승할 아들이 없거나 급작스레 당주가 죽지 않는 이상, 공주들은 모두 정략결혼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말이 좋아 결혼이지, 두 국가 사이의 인질이나 다름없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다양한 교육을 받..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전국시대에는 왜 항상 전란의 중심에 있었는가? 일본 전국시대;전국시대에는 왜 항상 전란의 중심에 있었는가? 전국시대는 '전'국이라는 말처럼 항상 전쟁과 함께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왜 그럴까요? 전쟁은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벌어지는데다, 전쟁 후에도 뒷 수습할 것들이 정말 많지요. 그렇기 때문에 전쟁에는 그에 상응하는 원인이 있거나, 사건이 있기 마련입니다. 전국시대의 전쟁의 가장 큰 이유는 토지의 부족입니다. 일본은 가마쿠시대부터 '고온(御恩)'과 '봉공(奉公)'에 의한 주종관계가 이루어져 왔습니다. 가신(家来)이 주군을 위해 일을 하고, 주군은 그 보답으로 토지를 하사하는 유럽의 중세시대의 영주와 기사의 관계와 비슷한 쌍무적 계약관계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계는 어디까지나 토지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지요. 이 시대에는 이미 이 주종.. 더보기
일본전국시대; 일본 전국시대의 진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일본전국시대;일본 전국시대의 진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전투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어떤 진을 선택하느냐 입니다. 특히 병농분리가 되지 않았던 전국시대에는 진을 잘못 짰다가는 병사들이 모두 도망쳐버릴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형은 엄청나게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일본 전국시대에는 헤이안시대에 당나라에서 오오에노 고레도키(大江維時)가 가져온 '8진'을 따라 진형을 취했습니다. 어린(魚鱗), 언월(偃月), 학익(鶴翼), 방원(方円), 봉시(鋒矢), 안행(雁行), 장사(長蛇), 형액(衡軛)의 여덟 종류의 진이 있었는데요, 각각의 진을 살펴보겠습니다. 어린진은 그 이름과 처럼 물고기의 형태로 진을 치는 것입니다. 한 부대를 '비늘'로 보아, 맨끝의 일점에 병력을 집중하여, 적을 넘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성에 대해(1) 전국시대 성의 역사 일본 전국시대; 성에 대해(1) 전국시대 성의 역사 일본 전국시대에 대해 보기전에 알고 넘어가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일본의 성의 구조입니다. 전국시대의 성은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에 들어와 벌어진 요시노산 주변을 무대에 행해진 공방전에서 태어난 산성, 아카사카성(赤坂城)이나 치하야성(千早城)이 시작이라고 말합니다. 평지가 아니고 게릴라전에 유리한 산 위에 성채와 같은 성을 쌓아 천연의 지형을 이용해 위에서 돌이나 통나무를 떨어뜨려 공격해 오는 적을 막는 방식의 성 이지요. 하지만 무로마치 시대 전기에는 정권이 안정되어, 성이 전투용이라기보다는 수호나 다이묘의 저택이라고 하는 의미가 커져, 방어보다는 화려함과 편리함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한편, 여러 무사들은 시골에서 각자 저택을 쌓고 살게 되..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