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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하시바 히데요시, 코우즈키성을 점령하다 코우즈키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하시바 히데요시, 코우즈키성을 점령하다

코우즈키성 공방전


 덴쇼 5년(1577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아카마쯔 마사노리(赤松政範)의 하리마(播磨) 코우즈키성(上月城)에 쳐들어갔습니다.


 요시아키의 편지로 인해 노부나가 포위망이 생기고, 노부나가가 그것을 하나하나 파괴해 나가고 있는 도중, 노부나가는  본거지로 하고 있던 기후성과 미노, 오와리를 장남 노부타다에게 맡긴 뒤 덴쇼 4년(1576년) 초부터 아즈치성(安土城)의 축성에 착수합니다. 이즈음 노부나가는 6년전의 겐키 원년(1570년)에서부터 계속된 혼간지와의 이시야마 전투(1차 이시야마전투의 발발), 텐노지 전투(텐노지 전투)에 이어, 제1차 키즈가와구 해전(키즈가와구 해전)에다가 우에스기 겐신까지 혼간지와 갈등을 끊고, 참전을 표명해 나나오성을 점령하고(노키자루의 활약, 나나오성 공방전) 테도리가와 전투(실재는 어땠을까? 테도리가와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히사히데도 반란을 결행하지요.(시기산성 공방전)


당시의 츄고쿠의 주요 성들 위치


 이 시기에 노부나가 자신은 기나이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부하의 무장들에게 각각의 지역을 담당시켜 영지를 확대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겐신이 참전한 호쿠리쿠에는 시바타 가쓰이에를, 이세에는 키타바타케에게 양자로 보낸 삼남 노부오(키타바타케의 최후), 산요 방면은 아케치 미쓰히데와 하시바 히데요시입니다. 이 때, 재빨리 노부나가의 산하로 들어갈 것을 표명한 것이, 후에 히데요시의 참모로 활약하는 쿠로다 칸베에 요시타카(黒田官兵衛孝高)가 속하는 하리마의 코데라(小寺)가 였습니다. 하지만 코테라가도 모리측에 붙을지, 오다측에 붙을 지 엄청난 고민을 했는데, 이 당시의 중소영주들은 모두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습니다.


쿠로다 요시타카


 그런 가운데 서 하리마의 코우즈키성을 본거지로 하는 아카마쯔 마사노리, 그는 무용이 뛰어난 무장이며, 선견지명을 가지는 명군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지요. 시간만이 흘러 드디어 히데요시의 군대가 성 가까이 오고 나서야 그는 후에 비웃음을 살지라도 의리를 지키겠다며 모리 지지를 천명합니다. 코우즈키성이 위치한 서 하리마는 모리가 차지한 이즈모, 미마사카, 비젠 등의 관문이기 때문에 엄청난 요충지였습니다. 히데요시는 다케나카 한베에나 쿠로다 칸베에(黒田官兵衛)을 선봉에 세우고, 코우즈키성의 지성이나 성채에 공격을 개시합니다. 지성의 성주 중에는 이미 히데요시에게 설득되어, 노부나가의 산하에 들어가는 일을 표명하고 있던 사람도 있었지만, 코우즈키성에 따르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우키타 나오이데, 꽤 잘생겼네요


 그렇지만 강군인 오다군에는 당해낼 수 없어 작은 지성이나 성채가 차례차례로 공략되어 가는 중, 덴쇼(연호)5년(1577년)말 오다군은 드디어 본성인 코우즈키성에 쳐들어갑니다. 측면과 정면의 두 진으로 나누어져 개시된 공격은 다음날 모리 산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의 원군이, 코우즈키성에 도착해 이 전투는 절정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격전 중에, 그 원군도 쓰러지고 맙니다. 얼마 뒤 물이 끊어지자, 더이상 농성이 힘들어집니다. 마사노리는 남아 있던 몇 안 되는 군사로 히데요시의 본진에 야습을 겁니다만 실패하고 맙니다.


 야습이 실패한 다음날 아침에 그소식을 들은 그는 성내에서 마지막 주연을 개최한 후, 아내를 그 손으로 찌른 뒤 스스로도 할복 했습니다. 그리고 주군의 최후를 지켜본 일족과 가신들도 차례차례 스스로의 생명을 끊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 코우즈키성을 함락 시킨 히데요시는 아마고가 멸망의 뒤에, 노부나가의 부하가 된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鹿之介)에게 이 코우즈키성을 지키게 해 미키성(三木城)으로 향하게 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요충지인 코우즈키성을 빼앗긴 모리가 가만이 있을 리가 없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