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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포위망을 펼치다, 미키성 농성전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포위망을 펼치다, 미키성 농성전


 덴쇼 6년(1578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든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의 거성 미키성(三木城)을 포위했습니다. 


 덴쇼의 초 무렵에 오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대장으로 하는 토벌군을 편성해 산요, 산인지방을 평정하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차츰 하리마의 여러 영주들은 오다 측으로 붙게 되었지요. 덴쇼 3년(1575년)에는 벳쇼 나가하루 도 노부나가에게 직접 찾아가 오다 측으로 가담할 것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덴쇼 6년(1578년) 초에 나가하루는 돌연 오다측에 일방적으로 지지철회를 선언해, 거성 미키성에서 농성합니다. 그 이유는, '노부나가의 잘난척을 견딜 수 없었다', '히데요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는 여러가지 설이 있습니다만, 아마 하리마 전체가 반오다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되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츄고쿠 주요성 위치도

 실제로 직후에 우키타히데이에(宇喜多秀)가(家)가 하리마 코우즈키성을 오다에서 탈환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이 기회를 잡은 아키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오다에 반발하는 하리마의 여러 영주를 도와주기 시작했지요. 미키성이 돌아섰다는 소식을 들어, 덴쇼 6년(1578년) 히데요시가 미키성을 포위합니다. 농성하는 나가하루군은 8천, 포위하는 히데요시군은 2만이여서 이미 머릿수에서 상대가 되지 않았습니다. 히데요시는 무리하지 않고, 장기 포위를 구상한 뒤 천천히 다른 장소를 점령해 갑니다. 도중  아마고 가쓰히사(尼子勝久), 야마나카 시카노스케(山中鹿之介)를 구원하기 위해, 코우즈키성에 출진하면서도, 미키 성밖의 히라이산(平井山)에 진을 쳐, 히데요시는 포위를 계속하며 그 사이에 성의 주위에 있는 성채나 지성을 차례차례로 점령 해 갑니다. 



벳쇼 나가하루



 물론, 나가하루도 가만이 있지만은 않고 때때로 나와 요격했습니다. 남동생이 전사하기도 하며 분전하던 그는, 3천이라고 하는 대량의 군사를 동원해 히데요시의 본진을 기습합니다. 하지만 이는 실패하고, 덴쇼 8년(1580년) 미키성은 심각한 식량부족과 물부족에 빠집니다. 히데요시는 이때가 공격시라는 판단을 해, 남아 있던 주위의 성채와 지성을 단번에 전멸시켜, 더욱 더 미키성을 고립시킵니다. 그리고 적당한 시기를 가늠해 히데요시의 군에 참가하고 있던 그들의 일족 벳쇼 나카무네(別所長棟)을 개입시겨 항복하도록 설득합니다.


 하리마에서도 제일 동쪽에 위치했기 때문에 모리의 원군도 오지 못할 것이라 판단한 당주 나가하루는 덴쇼 8년(1580년) 초에 남아 있던 소량의 식료로 자그마한 연회를 열어 군사들의 고생을 위로한 다음날, 일족 모두 할복 해 버렸습니다. 이 2년간의 포위는 히데요시에게도 쉬운일만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명참모, 다케나카 한베에가 여기서 유명을 달리했지요. 이 전투 이후, 히데요시는 모리와 직접 대결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