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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히사히데, 시기산성에서 장렬히 폭사하다 시기산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

히사히데, 시기산성에서 장렬히 폭사하다

시기산성 공방전



 덴쇼 5년(1577년), 오다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가 아즈치(安土)에 진을 쳐, 마츠나가 히사히데가 농성하는 야마토(大和) 시기산성(信貴山城)을 포위해 성벽아래에 불을 질렀습니다. 


 난세의 효웅이라는 이명을 가지는 마츠나가 히사히데는 산뜻할 정도로 사악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오히려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습니다. 미요시가에 들어가 미요시가를 몰락시키고(히사히데와 미요시가의 몰락), 대불전에 불을 지른 뒤(마츠나가 하사히데, 대불전을 불태우다) 쇼군 요시테루를 죽이는(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 암살당하다) 등 다른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짓들을 저지른 히사히데(물론 그 진위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런 그의 몰락은 다름아닌 그가 밥먹듯 해오던 배신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히사히데가 노부나가를 배반한 것은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겐키4년(1573년) 요시아키에 의해 노부나가 포위망이 완성되었을 때 신겐이 상경한다는 소식을 들은 히사히데는 바로 반란을 일으켰었습니다.(히사히데, 노부나가에게 첫 번째 반란을 일으키다) 하지만 이를 용서한 노부나가의 부하가 되어 이시야마혼간지 공격에 참여했지요. 하지만 다시 한번, 노부나가에게 위기가 찾아 왔습니다.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과 혼간지가 오랜 반목을 끊고 동맹을 맺은 데다가, 모리의 무라카미 수군이 오다수군을 격파하자 히사히데는 다시한번 노부나가에게 반기를 들 준비를 합니다.




 텐노지 성채 방비를 방폐하고 거성인 시기산성으로 돌아온 히사히데는 겐신의 상경을 기다리기로 하고 또다시, 노부나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윽고 그해 가을에 나나오성을 점령한 겐신은(겐신의 닌자, 노키자루의 활약, 나나오성 공방전) 에츠젠으로 진군하고 테도리가와에서도 승리합니다(실재는 어땠을까? 테도리가와 전투). 히사히데의 반란 소식을 들은 노부나가는 놀라 사카이의 다이칸(代官) 마쓰이 유우칸(松井友閑)을 사자로 시기산성에 파견해, '불만이 있다면 들어줄 테니 말하라'고 합니다. 반란을 일으킨 아자이와 아사쿠라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만든 노부나가 답지 않은 온정 넘치는 설득이지만 히사히데는 대화를 거부합니다. 하지만 겨울이 오자, 상경하던 겐신은 돌아가 버립니다. 에치고의 겨울은 상당히 유명하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 관동관령인 겐신의 배후를 호시탐탐노리는 호조를 견재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장렬한 전투, 시기산성 공방전


 이에 노부나가는 츠츠이 쥰케이(筒井順慶),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 호소카와 후지타카(細川藤孝)에게 시기산성을 공략하게 합니다. 시기산성의 동쪽의 위치에 있는 호류지(法隆寺)에 진을 친 노부나가군은, 우선 시기산성의 지성인 카타오카성(片岡城)을 공격해 점령 했습니다. 그리고, 그 2일 후의 덴쇼 5년(1577년)에는 노부나가의 장남 오다 노부타다(織田信忠)가 아즈치에서 진을 쳐 시기산성을 포위했습니다. 게다가 겐신이 겨울에 진군할 일이 없음을 알고 호쿠리쿠로부터 돌아온 하시바 히데요시, 사쿠마 노부모리등의 원군도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온정이 넘치는 노부나가는 공격 명령을 내리지 않지요. 그리고 히사히데에게 소유하고 있는 명다기 하라구모(平蜘蛛)를 바친다면 용서해주겠다고 합니다.



공격 개요도



 하지만 이 때의 히사히데는 예전과는 달랐던 것 같습니다.「가와즈미 다이코기(川角太閤記)」에 의하면, '히라구모와 우리들의 목은 가루가 될 것이다.'라며 노부나가의 제안을 일축 합니다. 결국 시기산성에 총공격이 개시됩니다. 하지만 축성 명인이기도 한 히사히데의 성은 쉽게 함락당하지 않았습니다. 불과 8,000의 성병에 불구한 히사히데의 군은, 4만의 대군의 오다군에게서 잘 버티고 있었습니다. 장기전의 양상이 되어가던 이 전투는 히사히데의 부하 모리 요시히사(森好久)가 200명의 총포대를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산노마루(三の丸:외성)에 불을 지릅니다. 견고한 성이라도 내부로부터의 공격은 견딜 수 없지요.



자폭하는 히사히데



  자신의 반란이 실패했음을 깨달은 히사히데는 여느 때처럼 중풍의 발작을 막는 뜸을 정수리에 두고 목을 빼았기지 않게 스스로의 얼굴에 불을 붙인 뒤에, 노부나가에게 말한 대로 히라구모의 안에 화약을 넣고 목에 쇠사슬로 건 뒤, 장렬히 폭사합니다. 아마 일본 전국시대에서 가장 기괴한 할복방식이 아닐까 싶네요. 사실 히사히데가 야규 우시게요시(柳生重厳)에게 진짜 하라구모를 보냈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야규가의 사료에 있기는 하지만, 그 후에는 기록이 묘연하기도 합니다. 노부나가가 노린 다기를 파괴하면서 죽은 것이, 마치 죽은 다음에도 노부나가를 비웃는 듯 해서 히사히데 답네요. 공교롭게도 그가 죽은 10월 10일은 그가 대불전에 불을 지른 날이기도 했습니다. 그가 말년에 이런 반란을 일으키고, 노부나가의 항복 제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그의 중풍이 심해져, 자신의 마지막 길을 예견했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어찌보면 이 반란은 자신에게 병을 줘 목숨을 거두려는 하늘에 대한 반항이 아니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