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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직업편

일본 전국시대 음양술을 이용해 미래를 보았던 음양사

일본 전국시대 직업편;
음양술을 이용해 미래를 보았던 음양사


 일본에는 '음양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대 일본에 존재한 여러 주술과 점술들을 이용해 길흉을 점치고, 식을 부리는 등 다양한 재주를 보였다고 합니다. 이런 음양도를 다루는 것이 바로 '음양사'입니다. 물론 신을 믿던 시대이니 만큼 이들의 활약은 지나치게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습니다. 

음양사의 모습


 '음양도'는 고대 중국에서 전해진 '음양오행설'에 일본 고래의 주술, 점술이 합쳐져 나타난 것으로 헤이안 시대 전부터 존재했었다고 합니다. 음양 오행설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화, 수, 목, 금, 토'의 5개의 속성(오행)으로 이루어 지고 '음'과 '양'에 의해서 그 변화가 생긴다고 생각하는 사상입니다. 여기에 더해 별의 움직임으로 동향을 점치는 '점성술'이나, 4개의 방위와 그것들이 맡는 속성 '화, 수, 토, 풍'을 점술에 도입한 '방위술(方術)'이나 '풍수지리(風水術)'등도 대륙에서 전해져, 거기에 일본 독자적인 운세나 주술이 섞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음양술 입니다.

오행도


 음양사들은, 헤이안 시대에 크게 활약했습니다. 헤이안 시대에는 나라의 기관 중 하나에 '음양사(陰陽寮)' 라고 하는 부서가 존재해, 거기서 점을 치는 것이 나라의 운영에 크게 관여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기에 특히 활약한 유명한 음양사가 바로 '아베노 세이메이(安倍晴明)'와 '아시야 도우만(蘆屋道満)입니다. 모두 헤이안 시대에 최강이라고 해진 음양사이며, 교토에서 음양술 대결을 한 일로 유명합니다. 서로 환상을 펼치거나 그것을 깨거나 해서 승부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승부를 주최한 문신은 상자안에 과자를 넣고 2명에게 운세로 그 내용을 맞히게 하기로 했습니다. 

전설적 음양사, 세이메이

 
우선 이시야 도우만이 '상자안에는 과자가 16개'라고 대답합니다. 실제로 문신이 넣은 과자의 수는 16개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아베노 세이메이가 '상자안에는 쥐가 16 마리'라고 합니다. 놀란 문신이 상자를 열자 그 안에서 16 마리의 쥐가 튀어 나와 세이메이가 승리했다고 합니다. 그 밖에도 이 2명은, '식신(式神)'이라 불리는 귀신을 조종하고 경호를 시켰다거나, 가뭄이 계속 되자 기후를 조종해 비를 내리게 했다는 등, 여러가지 전승이 남아 있습니다. 

 헤이안시대가 끝나고 가마쿠라 시대에 들어가자 음양사들의 영향력은 감소하기 시작했습니다. 가마쿠라막부에서는 '쇼군'이 지배하는 시대에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음양사(陰陽寮)는 교토의 덴노에 속하는 것이었으므로, 막부 정치에게는 별로 영향력을 가지기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쇼군역시 운세의 결과는 꽤 신경쓰고 있어, 영향력 자체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또, 악령이나 요괴도 당시에는 빈번히 있었기 때문에, 이런 사건에는 음양사나 무녀, 승려등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던 것 같습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후기에 있던 몽골의 침공 때도 다수의 음양사가 주술을 했다고 합니다. 결과적으로 강한 바람(일본 입장에서는 카미가제)가 불었기 때문에 체면은 섰겠네요. 하지만 점점 과학이 발전하고, 무사들의 힘이 강성해지며 음양사의 입지는 좁아졌습니다. 아베노 세이메이의 후손인 '츠지미카도(土御門)'가문과 경합을 벌이던 '카네노코우지(勘解由小路)'가의 멸망도 음양사의 쇠퇴에 한 몫했습니다.

음양사들의 주술



 그리고 전국시대가 도래했을 때, 이미 음양사의 입지는 좁아져 있었습니다. 당시의 음양도는 츠지미카도가의 비전 기술인데다 입지도 좁아져 '음양사'라 불리는 사람은 매우 적었던 것 같습니다. 단지, 음양도는 민간에게 퍼지고 있었고, 음양술을 응용한 운세는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었으니까, 음양도 자체는 아직 건재하기는 했습니다. 전국시대의 성터 곳곳에는 음양도의 흔적이 보입니다. 난세이니 만큼, 지푸라기라도 집는 심정으로 음양도로 점을 쳤겠지요. 각 영주가에는 전속의 음양사가 있었고, 전투 전에 점을 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음양사는 잠시 부활합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를 거머진 뒤에 그 조카 도요토미 히데츠구가 모반의 혐의로 유죄가 확정되어 처형되었을 때 츠지미카도가의 '음양두(음양사의 두령)'이 모반에 동조했다며 쳐형당하며 음양사들은 다시 입지가 좁아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도쿠가와 이야에스가 천하를 얻은 뒤, 음양도는 다시 중흥기를 맞이합니다. 그는 에도를 조성할 때 '풍수', '오행'등을 이용했기 때문입니다. 음양사(陰陽寮)역시 에도막부에 서리되어 천문학, 달력작성 까지 맡아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