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세이난 전쟁(5) 시로야마의 결전! 사이고 다카모리 사망
메이지10년(1877년) 9월 24일, 시로야마로의 최종 결전으로 총지휘관인 사이고 다카모리가 사망해 7개월 남짓에 걸친 세이난 전쟁이 종결했습니다.
패배한 사츠마군은 구마모토성을 방폐하고 일단 히토요시에서 반격 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히토요시도 6월 1일에 정부군에게 점령되어 미야자키로 도주했습니다만 7월 24일에 미야코노죠도 함락 되어, 7월 30일에는 미야자키도 함락 됩니다. 그 다음 타카나베도 점령되어 사츠마군은 계속해 북쪽으로 쫓겨 납니다. 이윽고 8월 14일에는, 본영을 두고 있던 노베오카도 정부군에게 점령되어, 그 다음날에는 노베오카를 탈환하기 위해 사이고 다카모리 스스로 선두지휘하며 기세를 올립니다만, 유감스럽지만 패퇴합니다. 이 즈음에 이미 투항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아, 불과 600명정도로 되어 사츠마군은 정부군에 둘러싸여 버립니다.
사츠마군은 가고시마에서의 재기를 맹세하고 야음을 틈타 산속으로 도주했습니다. 당분간 자취을 감추고 있던 그들이 가고시마에 나타나는 것은 반달 뒤인 9월 1일이었습니다. 약 200일만에 본거지로 돌아온 사츠마군은 신정부군에 점거되고 있던 사립학교를 탈환해 각지를 전전해 다시 가고시마의 대부분을 점령합니다만, 그 뉴스를 전해 듣고 잇달아 가고시마에 도착하는 정부군에게 압박 되어 서서히 행동 범위를 좁혀져 가고시마시가지의 중심에 위치하는 해발 107 m의 시로야마(城山)에 들어가게 됩니다. 항복하지 않고 끝까지 철저 항전의 자세인 사츠마군은 이와사키 골짜기에 10개 정도의 굴을 파, 간부들은 그 속에서 지휘를 합니다.
시로야마 공방전
9월 10일에 도착한 정부군의 총지휘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는 '첫째로 포위, 둘째로 공격'이라는 방침 아래, 시로야마의 주위에 토루를 쌓아 올리고, 해자를 판 뒤, 목책을 세웠습니다. 그 수는 약 5만명, 반면 농성하는 사츠마군은 372명이었습니다. 사츠마군의 병량은 약 50일분뿐이었습니다. 팽팽한 긴장이 전장을 뒤덮는 중에, 정부군은 총공격을 9월 24일의 오전 4시로 결정햇습니다. 한편 사츠마군은 결사의 항전을 호소하는 키리노 토시아키(桐野利秋)에 대해서, 헨미 쥬로타(辺見十郎太)나 코노 슈이치로우(河野主一郎) 등은 사이고 다카모리만은 살리려 합니다. 하지만 정부군은 항복을 권고하고, 사이고 다카모리는 이에 철저 항전을 결정합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할복
그 날의 밤 사츠마군은 마지막 연회를 개최했습니다. 메이지10년(1877년) 9월 24일 오전 4시 3발의 대포와 함께, 일제히 총을 난사하면서 시로야마를 오르는 정부군 병사들에 각처에 설치되어 있던 사이는 차례차례로 점령되어 불과 2시간 뒤 남은 것은 본영이 있는 이와사키 골짜기만이었습니다. 전원 할복을 각오한 사이고 다카모리 이하, 약 40명의 간부들은 굴을 나와 이와사키 골짜기의 성채를 향해 걷기 시작합니다. 그 때 적이 발사한 총탄이 다카모리의 옆구리와 가랑이에 명중해 그는 거기서 자신의 최후를 깨달고 자리잡은 뒤 할복합니다. 이렇게 해서 무사들의 마지막 반란은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다카모리의 목이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여러가지 설이 탄생하게 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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