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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세이난 전쟁(3) 일본의 운명을 정한 다바루자카 전투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세이난 전쟁(3) 일본의 운명을 정한 다바루자카 전투



 메이지10년(1877년) 3월 20일, 세이난 전쟁에서 가장 격전이었던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정부군이 승리했습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설립한 사립학교의 학생들의 폭동을 계기로 메이지 정부에 불만을 가지는 사족의 반란으로 발전한 세이난 전쟁, 우선 구마모토성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가고시마를 출진한 사츠마군이었지만, 그 견고한 성곽과 친다이 병사의 분전으로 쉽게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차례로 상륙하는 정부의 원군을 요격하기 위해, 구마모토성에는 포위하는 군사를 남겨, 본대는 북상했습니다. 그리고 북상한 사츠마군 선봉대가 우에키(植木)의 결전에 승리했습니다. 이 승전보와 함께 '현재, 정부군이 타카세(高瀬)에 집결 중'이라는 소식이 들어옵니다. 2월 27일 타카세를 공략하기 위해 키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 등 주력 2,800명이 타카세 근처에서 정부군과 부딪칩니다. 그러나 정부군은 철도와 배로 대량 수송을 해 차례로 전력을 증강했습니다. 결국 키리노 부대는 격퇴되어 버렸습니다.


다바루자카 전투에서 패배하는 사츠마군



 여기서 사츠마군은 무리하면서 진군하기 보다 지금은 이 전선을 사수하는 작전으로 변경합니다. 이 시점에서 포위된 구마모토성이 함락된 다면 이 성을 거점으로 반격을 개시하려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사츠마군은야마가~타하라~키치지자카~카와치 해안의 40Km에 달하는 일대에 방위선을 쌓아 올렸습니다. 한편, 정부군은 이 전선을 깨고 병량이 다하기 전에 구마모토성을 구출해야 했습니다. 3월 3일 정부군은 다바루자카와 키치지자카에 초점을 맞춰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다음날의 4일, 사츠마군이 키치지자카에서 격퇴되었기 때문에 그 뒤 정부군은 공격 목표를 다바루자카로 좁혀  사츠마가 자랑하는 근접전에 대항하기 위해, 사족 출신들을 모아 발도대를 조직 했습니다. 이 발도대에 구 아이즈번사를 대부분 기용해 보신 전쟁을 풀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편 사츠마군은 다바루자카의 양측이 높은 제방이 되어 있는 일을 이용해 지나가는 정부군의 병사의 머리 위에서 부터 총격을 퍼부어 그 혼잡 속에서 사족들이 돌진한다는 작전을 세웠습니다. 당분간 정부군에 승리를 거뒀습니다만, 서서히 전세는 불리하게 되어, 3월 15일에는 다바루자카와 키치지자카의 중간에 있던 사츠마군의 요소 요코하라산(横平山)이 탈취되어 버립니다. 정부군은 '많은 수', '최신예의 무기' 외에도 비밀 무기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 그 정보를 빠르게 주고 받을 수 있는 '전보'였습니다. 일본의 전신 기술은 메이지2년(1869년)의 12월에 도쿄~요코하마 전보를 개시한 것을 시작으로, 급속히 발전해 메이지 8년(1875년)에는 구마모토까지 가설되고 있었습니다. 세이난 전쟁 때 정부군은 육지와 함께 통신망을 구축해 점령한 땅에 차례로 전신을 가설했습니다. 거기다가 암호화까지 끝마쳐 사츠마군의 감청을 막았습니다.


쓰려져가는 사츠마의 사족들



  이 다바루자카의 격전 중에도 남하하는 정부군 주력 부대와 동시에 남쪽에서 상륙 작전이 전개되고 있고, 3월 19일에는 구마모토성이 있는 시마바라만과 우도반도를 사이에 둔 야츠시로해의 해안에 상륙해, 해안의 방비에 임하고 있던 소수의 사츠마군을 격퇴하고 그 날에 야시로(八代)를 점령해 버리고 있었습니다. 상기의 전신망을 통해 이 소식을 빨리 전달받은 정부군은 다음날 다바루자카를 총공격하기로 했습니다. 3월 3일에 시작되어 격전이 계속된 17일 간 대부분 비가 내렸던 다바루자카는 역시 이 날에도 시야가 매우 나빴습니다. 이것을 이용해 정부군은 밤에 다바루자카의 남쪽을 우회 해 남동측에 돌아가, 새벽과 동시에 기습공격을 감행 했습니다.


 '이쪽으로부터의 공격은 없을 것이다'라고 방심하고 있던 나나모토(七本) 포대의 사츠마군은 단번에 무너져 패주합니다. 그 기세로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는 사츠마군의 패배는 이미 명백했습니다. 결국 메이지10년(1877년) 3월 20일 다바루자카는 함락 됐습니다. 이 때 호치신문(報知新聞)의 기자로 세이난 전쟁을 취재하고 있던 이누카이 츠요시(犬養毅)는 사츠마의 패인을 '첫째로 비, 둘째로 빨간 모자, 셋째로 대포'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격전의 17일간의 대부분의 날씨가 비였기 때문에, 구식의 총이 주류였던 사츠마군은 습기 때문에 약협에 불이 붙기 어려웠지만, 정부군의 총은 비가 내려도 괜찮은 최신의 총이었습니다. 그리고 부국 강병으로 모아진 농민 중심의 친다이에 비해, 사족 중심으로 모인 빨간 모자로 불리는 근위병들의 수의 차이는 컸습니다. 게다가 대포의 수는 정부군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누카이의 보고에 의하면, '사츠마군은 대포나 소총도 거의 쏘는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다바루자카를 철퇴한 사츠마군은 전보가 없었기에 이즈음 야시로의 점령을 알고 당황해 남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