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세이난 전쟁(4) 구마모토성 공방전 종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세이난 전쟁(4) 구마모토성 공방전 종결



 메이지 10년(1877년) 4월 15일, 세이난 전쟁으로 인해 사츠마군에 포위되고 있던 구마모토성에 정부군이 입성해 52일간에 걸친 구마모토성 공방전이 종결했습니다.


 메이지10년(1877년) 1월 30일, 가고시마의 사립학교의 학생에 의한 정부 화약고 습격 사건으로 발발한 세이난 전쟁에서  정정당당히 육로로의 북상을 결정한 사츠마군은 2월 15일에 가고시마를 출진해, 2월 22일에는 큐슈의 방비의 요점인 구마모토성을 공격합니다. 하지만 견고하기로 유명한 성에 고전하는 중, 정부의 원군이 해로에서 큐슈로 향해 잇달아 하카타로 상륙하고 있다는 정보를 얻어, 일부의 군사를 구마모토성의 포위에 남기고 본대는 남하하는 정부군을 요격할 수 있도록 한층 더 북상하게 됩니다. 그 뒤 사츠마군은 정부군을 막기 위해 야마가~타하라~키치지 일대 약 40 km에 건너 방어선을 구축해 준비를 강화했습니다. 정부군은 3월 초 무렵부터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타바루자카에서 대승한 정부군



 3월 18일에 동쪽에서 구마모토성의 구원을 시도하는 정부 케이시타이(警視隊)가 사츠마군의 구마모토성 포위 부대와후타에토우케에서 맞붙는 것과 동시에, 19일에 해로에서 우회 해 구마모토성의 남쪽 야츠시로해에 상륙한 별동대 쇼우하이군(衝背軍)이 야시로(八代)를 점령했습니다. 정부군은 이어 3월 20일에 다바루자카 총공격을 개시해 승리합니다. 전보로 정보를 전달하는 정부군에 비해, 사람이 정보를 전달하던 사츠마군은 이즈음 야시로를 점령당한 사실을 알게 되어, 포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남하합니다.


 3월 26일에는 이 사츠마의 남하군과 쇼우하이군이 오가와(小川)에서 충돌합니다. 그 날 승리한 쇼우하이군은 북상해, 패배한 사츠마군도 북쪽으로 후퇴합니다. 3월 31일 마츠바세(松橋)에서의 충돌에서는 논에 해수를 끌어 들여 근처를 수몰시켜, 어떻게든 방위하려고 하는 사츠마 남하군이었지만, 오히려 조수를 이용해 우회한 쇼우하이군에 배후를 찔려 패배해 버립니다. 4월 1일에 우토(宇土)를 점령한 쇼우하이군은 그 기세를 몰아 4월 12일 드디어 구마모토성으로 진군 합니다. 다음날인 13일 이 때 남하군의 지휘를 맡고 있던 사츠마군 3번 대대장 나가야마 야이치로우(永山弥一郎)는 기세 등등하게 진군 하는 쇼우하이군을 눈앞으로 두고, '이 패전의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며 민가에 불을 지르고 할복했습니다.


타니 타테키



 이렇게 해서 메이지10년(1877년) 4월 15일, 1만 하고도 천의 사츠마의 군사에게 포위당한데다 원래 농민인 아마추어 집단인 친다이와 함께 52일간 버틴 구마모토성의 포위가 풀렸습니다. 구마모토 친다이의 지휘관 타니 타테키(谷千城)는 적에게 저격 되어 탄환이 목을 관통당하는 중상을 입으면서도, 운 좋게 탄환이 기관지를 빗겨 나가, 1주일 동안 몸조리 한 뒤, 다시 지휘를 했었다고 합니다. 


 한편, 구마모토성을 버린 사츠마군은 일단 한층 더 남쪽의 히토요시(人吉)에 거점을 둡니다. 여기도 6월 1일에 함락되어 그 뒤 후유가(日向)를 전전해, 7월 24일에는 미야코노죠(都城)가 함락, 30일에는 미야자키(宮崎)도 떨어져 다음달의 8월 14일에는 본영이 있던 노베오카(延岡)도 점령되어 버립니다. 8월 15일에는 그 노베오카를 탈환하기 위해 결사의 전투를 결의한 사츠마군은 이 세이난 전쟁에서 처음으로, 총지휘관인 사이고 다카모리 스스로 전투의 선두지휘를 맡게 됩니다. 


 격렬한 싸움으로, 사츠마군 3,000명은 많이 분전 합니다만, 결국 패퇴합니다. 다음날 다카모리는 사츠마군의 해산을 포고합니다. 그 때문에, 사츠마군의 많은 사람이 투항해, 최종적으로 600 남짓 남은 군사들은 야음을 틈타 자취를 감추었습니다.하지만 아직 세이난 전쟁이 종결된 것은 아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