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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세이난 전쟁(1) 사츠마군 가고시마에서 출진!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세이난 전쟁(1) 사츠마군 가고시마에서 출진!



 메이지10년(1877년) 2월 15일, 사이고 다카모리가 인솔하는 1만 3천의 사츠마군이 가고시마를 출발해 세이난 전쟁이 개시되었습니다.


 메이지10년(1877년) 1월 30일에 가고시마 사립학교의 젊은이들에 의해 정부의 화약고가 습격당하는 사건이 발발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메이지 신정부의 방침에 불만에 불만을 더해가는사족들을 규합한 사이고 다카모리는 2월 5일에 열린 회의에서 스스로 총대장이 되어 군사를 일으킬 결의를 했습니다. 다음날인 2월 6일에 사립학교의 이름을 '사츠마군 본영'이라 고쳐 구체적인 작전 회의에 들어갑니다. 여기서 해로를 통해 도쿄에 상륙하는 작전이나, 본대와 별동대로 나누는 작전 등에 대해 논의를 합니다. 하지만 기습작전은 무사의 수치라며 정정당당히 육로로 향해 대의를 알리자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었습니다.


사츠마군 출진!



 사츠마에서 모인 것은 약 1만 3천명의 정예 부대였습니다. 그러나, 당연한일이면서, 이 가고시마의 불온한 공기는 정부에 곧바로 전해집니다. 2월 9일 정부에서 다카모리의 진의를 묻기 위해 파견된 카와무라 스미요시(川村純義)와 하야시 도모유키(林友幸)는 사립학교의 기세등등한 학생들 때문에 다카모리를 만날 수 조차 없었습니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정부와 구마모토 권령에 이 사태를 전달 했습니다. 이 전보를 받은 육군 대장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県有朋)는 즉시 각지의 친다이(鎮台)[각주:1]에 출동 명령을 내리고, 구마모토 친다이의 사령관인 타니 타테키(谷干城)에게는 '절대 사수'의 격문을 보냈습니다. 


 메이지10년(1877년) 2월 15일, 50년만의 폭설이 내리는 아침 구마모토로 향해 사츠마군의 선봉을 맡은 벳푸 신스케(別府晋介) 가 인솔하는 군대가 가고시마를 출발했습니다. 한편, 구마모토를 사수하는 3,400명의 군사는 정부의 원군이 도착하는 그 날까지 방어를 해야 했습니다. 이곳은 가토 기요마사가 쌓아 올린 난공불락의 구마모토성이 있는 곳입니다. 타니 타테키는 이 성에서의 농성을 결의합니다. 이 메이지10년의 시점에서 개통하고 있던 철도는 신바시~요코하마, 교토~오사카~코베 뿐이었기 때문에 물자의 수송은 해군이 담당했습니다. 도쿄의 군대는 신바시에서 출발해 요코하마로 향해, 요코하마항에서 배를 타고 큐슈로 향했습니다. 한편, 교토의 군대는 코베까지 이동해, 코베항에서 세토내해를 거쳐 서쪽을 향했습니다. 여담이지만, 이때 대량의 병사가 오사카와 코베역을 이용했기에, 여기서 일본의 유명한 역에서 파는'벤또'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사츠마군의 가고시마 정벌



 철저 농성을 하려던 구마모토 친다이 이지만 2월 19일 구마모토성의 대 천수각과 소 천수각이 원인 불명의 화재로 소실되어 버립니다. 이 화재를 일으킨 것은 사츠마의 스파이라는 설, 구마모토 친다이의 사령관인 타테키가 배수진 같이 숨을 장소를 없애 사기를 올리려고 한 것이라는 설 등이 있습니다. 2월 20일 밤 최초의 교전이 발발합니다. 사츠마의 선봉대인 벳푸 부대가 카와지리(구마모토현)에 접어 들었을 때, 구마모토 친다이에 의해 급습이 시작되었습니다. 소규모 전투에서 사츠마가 우세를 점한 가운데 친다이의 하사가 잡혀 타테키가 철저하게 농성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의해 사츠마군은 전군으로 구마모토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우선 전군을 반으로 나누고 한 부대는 공격군, 한 부대는 수비군으로 한 뒤 공격군을 정면(성의 동남쪽)과 측면(성의 서북쪽)의 두 패로 나누어 구마모토성을 포위합니다. 사츠마군의 4번 대대장으로 사이고 다카모리의 오른팔인 기리노 도시아키(桐野利秋)는 '상대는 농민에 지나지 않는다! 100만 대군이라 해도 우리가 이길 수 있다!'며 병사의 사기를 높였습니다. 

  1. 옛날 지방을 수비한 군대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