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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정한론 논쟁, 메이지 6년의 정변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정한론 논쟁, 메이지 6년의 정변



 메이지6년(1873년) 10월 24일 메이지 정부 내에서 정한론 논쟁이 일어나 사이고 다카모리가 참의직을 사직했습니다. 일본의 운명을 결정한 메이지6년의 정변이 발발한 것입니다.

 

 연호도 메이지가 되어 수도의 이름도 에도에서 도쿄로 바꾸었습다. 도쿠가와 막부에 진저리 나고 있던 사람들은 유신에 많이 기대했습니다. 새로운 사상, 새로운 학문도 일어났고 마을과 마을은 철도로 연결되었습니다. 사람들의 생활은 크게 변했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만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반으로 한다고 약속하고 있던 세금은 반대로 이전의 배가 되어 버렸고, 일부 사람들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에 비해, 서민의 생활은 이전과 다르지 않기는 커녕 오히려 나빠지고 있었습니다. 그런 중에 제일 큰 문제는 사족(士族)으로 변한 사무라이들이었습니다. 판적봉환(版籍奉還 ), 폐번치현(廃藩置県)으로 번은 없어지고, 번주는 치지(知事)는 역이 대신하게 되었습니다.


메이지 6년의 정변


 일반 사무라이들은 사족이라는 이름이 주어지기만 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다른 일반인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특권층이었던 사무라이 이지만, 징병령이 나와 일반인도 군대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 존재는 의미가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원래 번이 지불하고 있던 녹을 메이지 정부가 대신해 지불하는 일이 되어 있었습니다만, 그런 것 곧바로 재정은 막혀 버립니다. 그런 사족들의 상황에 마음 아파하고 있던 것이 다름아닌 사이고 다카모리였습니다. 이 즈음 도쿠가와 막부에서 메이지 덴노에게로 실권이 넘어갔다는 것을 알리는 일본의 국서를 조선이 황제국인 청에서만 쓸 수 있는 '황()'과 '칙()'이 들어가 있었기에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개항한 이후로 조선이 국교를 단절해 버렸었기에 조선과의 사이는 매우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이 악화된 관계를 회복 하려고, 외무성의 관료가 부산에 나가기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전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국가에 대한 모욕이라고 판단한 태정대신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가 '육군, 해군을 조선에 보내 조선에 있는 일본인을 보호하자'는 주장을 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의견들을 일컬어 '정한론(征韓論)'이라 합니다. 당연히 보호는 명목으로, 실제로는 조선을 정복하려던 것이지요. 이 정한론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반대합니다. 그는 대신 사절로 조선을 방문해 보겠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메이지 정부의 요인들이 동의했습니다. 하지만 중심인물들이 유럽을 시찰하고 있었기에 의견은 보류하게 되었습니다.


회의에서 소외된 사이고 다카모리



그런데 유럽에서 돌아온 네 명은 다카모리의 의견에 맹반대 해, 결국 내각회의는 다카모리 반대파가 주도하게 됩니다. 다카모리는 대화를 하려 했지만, 반대파는 사이고가 가면 반드시 전쟁이 일어난고 생각해 반대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오쿠보나 이와쿠라 등이 사이고 다카모리를 정계에서 배제하기 위해서, 정한론을 구실에 사용했을 뿐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6년(1873년) 10월 24일 사이고 다카모리, 이타가키 타이스케, 고토 쇼지로, 에토 신페이, 소에지마 다네오미 등이 일제히 사직했습니다. 그 후에 이타가키와 고토는 애국공당(愛国公党)을 결성해 그것은 이윽고 자유민권운동로 발전해 갔습니다. 한편 다카모리는 가고시마로 돌아와 학교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다카모리가 정계에서 이탈해 매우 쇼크를 받은 것은 다름아닌 사족들이었습니다. 이제 사족의 불만은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