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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하코다테 전쟁(3) 신정부군의 하코다테 총공격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하코다테 전쟁(3) 신정부군의 하코다테 총공격



 메이지 2년(1869년) 5월 11일, 메이지 신정부군에 의해 하코다테 총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작년 4월 신정부는 막부측에 에도성의 명도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의 근신 그리고 군함의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다키아키는 카츠 가이슈의 설득에 따라 일단 군함을 인도했지만, 아직 이길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던 그는 최신예의 군함 카이요우마루 이하 8척의 군함과 함께 에도를 탈출해 막부측 인사들과 함께 북쪽을 목표로 했던 것입니다. 에조에 상륙한 에노모토 등은 고료카쿠(五稜郭)나 마츠마에성(松前城)을 점령해, 에조지를 평정했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에조 공화국은 기함 카이요우마루를 잃어 원래 구매했던 군함 코우테츠(甲鉄)를 빼앗으려고 미야코만 해전이 발발합니다. 그리고 이 해전을 계기로 하코다테 전쟁이 개전했습니다. 야후라이 전투에서 승리한 신정부군은 하코다테로 향했습니다.


하코다테 전쟁



 한 달이 지난 5월 2일 본국 프랑스에서 귀국 명령을 받아 에노모토군의 군사 지도를 계속해 주고 있던 프랑스인 프류네가 '일본의 친구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이미 대세는 기운듯 하다'고 하고 하코다테항에 정박중이던 프랑스함으로 돌아와 가버렸습니다. 이렇게 최종 결전의 기운은 서서히 높아져서 갑니다. 그 5일 뒤 5월 7일  움직일 수 있는 군함은 카쿠텐 뿐이던 하코다테 만에 신정부군의 함대가 침입합니다. 4시간에 걸치는 포격에 의해 카쿠텐도 조종 불능이 되어 버렸습니다. 이제 육전으로 결착을 내야 하는 에노모토군은 하코다테의 시가를 남북으로 흐르는 카메다가와를 따라서 일직선의 전선을 완성시킵니다.  그런 가운데, 메이지2년(1869년) 5월 11일 드디어 신정부군은 하코다테에 총공격을 시작합니다. 이른 아침 신정부군이 하코다테산에 주둔하며 그 정상에 신호라고 할 수 있는 국화 문장이 들어간 기를 세웠습니다.


 게다가 신정부군은 북측의 사릉곽(四稜郭), 서쪽의 나나에하마(七重浜), 남쪽의 하코다테산의 세 방향에서 동시에 하코다테 시가로 향해 쳐들어갑니다. 물론, 나나에하마에서는 쵸우요우(朝陽), 테이호우(丁卯) 2척의 군함에 의한 원호 포격도 있었습니다. 이 때, 5월 7일의 하코다테 만 해전 때에는 수리중이었기 때문에 출격 할 수 없었던 에노모토군의 마지막 군함 반료우(蟠龍)가 발한 포탄이 쵸우요우의 화약고에 훌륭히 명중해 대폭발을 일으켰습니다. 이에 에노모토군은 사기가 크게 높아집니다. 이 때 궁지에 빠져 있던 나나에하마의 구원으로 향한 신선조 하지가타 토시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말라며 군대를 격려합니다. 여기서 벤텐미사키(弁天岬) 포대가 고립하고 있다는 정보가 도착합니다.


분전했지만, 마지막 저항도 끝나고 말았습니다



 이 벤텐미사키 포대는 에노모토군이 구축하고 있던 전선의 최남단으로, 당시 최고라 구가된 대포를 장비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5월 3일에 잠입한 신정부군 게릴라에 의해, 대포가 파괴된 상태였습니다. 비록 대포는 사용할 수 없어도, 기지로서는 중요한 곳으로 사수해야만 했습니다. 나나에하마에서 돌아온 토시로는 벤텐미사키 포대의 구원으로 향하려고, 다시 출격 합니다. 하지만 그 직후 복부에 총탄을 받아 넘어져 버렸습니다. 향년 35세로 신선조의 대표 대원 중 한 명이 쓰러진 것입니다. 이 날은 토시로 뿐만이 아니라, 대장 클래스가 다수 죽었습니다. 이윽고, 반료우도 포탄을 다 쓴뒤 격침되었고 진지도 차례로 함락되어 에노모토군의 기지는 본영인 고료카쿠와 치요가오카진야(千代ヶ岡陣屋), 벤텐미사키 포대의 3곳만이 남어 버렸습니다.


 다음 12일부터 신정부군 참모 쿠로다 키요타카(黒田清隆)가 에노모토 다케아키에게 항복 권고를 시작합니다. 15일에는 벤텐미사키 포대가 항복, 16일에는 치요가오카진야도 함락 합니다만, 이때까지도 에노모토 다케아키는 죽을 각오를 굽히지 않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군사를 보고 그도 항복을 결의해 여기서 에조 공화국은 멸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