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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쇼세이당 잔당 봉기! 마츠야마 전쟁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쇼세이당 잔당 봉기! 마츠야마 전쟁



 메이지 원년(1868년) 10월 6일, 유신의 폭풍우안에 미토번에서 쫓겨난 구 쇼세이당(旧諸生党)과 그것을 추적하는 구텐구당(旧天狗党)의 싸움인 마츠야마 전쟁이 있었습니다.


 존왕양이를 내거는 미토학의 권위자 후지타 도코(藤田東湖)의 아들 후지타 고시로(藤田小四郎)가 츠쿠바에서 시작한 텐구당은 도중에 다케다 고운사이(武田耕雲斎)를 총대장으로 맞이했으나, 불과 1년에 못 미친 활동으로 유신의 전조가 되고 유성과 같이 져버렸습니다. 너무 이른 존왕양이의 움직임에 소동을 수습하려는 막부와 미토번을 앞에 두고 텐구당은 818명 중, 죽을 죄를 지은 352명을 포함한 합계 817명이 형에 쳐해진(무죄가 된 1명은 여성) 비참한 결말로 막을 내렸습니다. 텐구당의 처형으로부터 약 1년 뒤, 삿초 동맹이 결성되어 그 반년 뒤에는 텐구당과 같은 존왕파의 조슈가 제2 차 조슈 정벌에 승리했고, 그 다음 해의 10월에는, 제15 대장군이 된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대정봉환을 발표합니다.


텐구당의 난



 그 사이 미토번은 텐구당이 처형된 일로 번내의 존왕양이파는 괴멸 상태가 되어, 그들에게 승리한 쇼세이당의 이치카와 산자에몬(市川三左衛門) 등을 시작으로 하는 사바쿠파(막부 중시)가 주를 이루게 됩니다. 그들 사바쿠파가 전대미문의 대폭 증가로, 일제히 봉급이 오르는 중, 패전의 주모자가 된 다케다 고운사이의 집에서는 3세의 유아까지 학살된다고 하는 비참한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말씀드린데로 세상이 바뀝니다.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이 아침이 밝고 나서 머잖아 토바 후시미 전투가 발발합니다. 여기서, 막부군의 패배를 알아 얼마안되는 측근을 데리고 에도성으로 돌아가 버린 쇼군 요시노부덕에 낙동갈 오리알 신세가 된 것이 요시노부에 따라서 교토의 혼고쿠지(本國寺)에 주둔 하고 있던 미토번의 수위대 223명이었습니다. 


 실은 그들은 텐구당에 속하지 않기는 했지만, 모두 존왕파로 처벌을 받아 봉급도 대폭 줄어들어 사바쿠파가 득세하는 미토번의 현황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집단입니다. 그렇기에 멀게 멀어진 최전선에 배치되어 있었던 것이지만, 그런 그들이 이대로 돌아갈 리가 없습니다. 그들은 조정에서 「제간청소 반정 실행(除奸掃除 反正実行)」의 칙서를 받아, '번정을 묻는다!'고 하는 대의명분을 짊어져 귀국했습니다. 이즈음 관군이 된 삿쵸군도 동쪽으로 진군 하고 있었기에, 이들의 기세는 최고조가 되어 에도성무혈 개성보다 1개월 빠른 3월에 미토성을 탈환합니다. 이에 사바쿠파와 쇼세이당 등 500여명은 그대로 북쪽으로 도망쳐, 나가오카나 니가타에서 전개되고 있던 키타고에 보신 전쟁에 참가합니다. 이윽고 나가오카번도 넘어지자 남은 아이즈로 향해, 여기서 농성전에 참가합니다. 


마츠야마 전쟁 사적지



 한편, 이치카와 등이 떠난 미토는 5월이 되자 고운사이의 손자 타케다 킨지로(武田金次郎)를 시작으로 해 낙도형(遠島刑)을 받았던 사람들이 잇달아 귀환해 옵니다. 킨지로의 귀환 늠름하고 화려해, 마치 승리의 개선 귀국같았다고 합니다. 구텐구당으로 결집한 그들은 복수를 결의해 쇼세이당과 인연이 있던 사람들의 저택을 습격해 살육을 반복했습니다. '메이지는 겐지[각주:1]보다 잔학하다'라고 칭해질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런 고향의 소문을 들었는지 이치카와 등 쇼세이당과 보신 전쟁에서 싸운 막부군의 잔존을 포함한 총원 500명이 미토에 되돌아와, 9월 28일에는 번교인 코우도우관(弘道館)을 점거해 10월 1일부터 2일에 걸쳐 미토성 탈환을 목표로 해 격렬하게 싸웁니다만, 목적은 완수하지 못하고 패주해 지바 방면으로 도주합니다.


 하지만 이미 주위의 번에서는 토벌군이 편성되어 이미 역적이 된 그들에게는 숨을 곳도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메이지 원년(1868년) 10월 6일, 미토번군이 된 구텐구당은 마츠야마 마을에서 그들을 찾아내 여기서 총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마츠야마 전쟁 혹은 요우카이치바 전투라고 하는 이 전투는 약 2시간 정도로 종결해, 여기서 쇼세이당은 괴멸하고, 전장에서 도주한 이치카와도 다음해인 메이지 2년 2월에 잡혀 책형에 처해집니다. 이것으로 미토번의 보신 전쟁은 간신히 마지막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치카와가 잡혔을 때 그는 프랑스어 공부를 하고 있었고, 유학을 생각하고 있었다고 하니 그 역시 일본의 장래를 고민한 이들 중 하나였겠지요.

  1. 텐구당이 활동한 1년의 일을 말합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