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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아이즈 전투(7) 와카마츠성 함락, 아이즈 전쟁 종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아이즈 전투(7) 와카마츠성 함락, 아이즈 전쟁 종결



 메이지 원년(게이오 4년, 1868년) 9월 14일 에도막부 말기에 일어난 아이즈 전투에서 아이즈 와카마츠성에 총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막부군의 패배로 끝난 토바 후시미 전투 후, 관군이 된 삿쵸군은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나 아이즈번주 마츠다이라 가타모리(松平容保), 쿠와나번주 마츠다이라 사다아키(松平定敬) 등을 역적으로 하고 토벌령을 내, 동쪽으로 나아갑니다. 요시노부는 에도성을 명도해 스스로 근신하기로 했습니다. 한편, 가타모리는 요시노부에게서 토쇼금지령의 선고를 받습니다. 이에 가타모리는 아이즈로 돌아가 군제를 정비하며 싸움의 준비에 들어갑니다. 그 사이에, 신정부 측에 붙은 센다이, 요네자와의 양번은 '아이즈번 구제의 탄원서'를 제출합니다만, 허무하게 각하 되어 싸움을 결의한 나가오카번등과 함께 아이즈번은 토호쿠의 번들에 의한 오오우에츠열번 동맹을 결성해 보신 전쟁은 토호쿠로 무대를 옮깁니다. 관동의 전투, 기타고에의 전투와 동시에 진행된 아이즈 전투가 드디어 시작된 것입니다. 아이즈번과 연합군은 보나리토우케에서 신정부군에게 대패하고 맙니다. 와카마츠로 진군하는 신정부군을 막으려한 사가와 칸베에와 마츠다이라 기타모리도 쥬로쿠바시, 도노쿠치가하라에서 대패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와카마츠성에 쳐들어 옵니다.


옛날 와카마츠성의 모습



 처음에는 열세였지만 잘 버틴 아이즈번이었지만 9월 4일 함께 저항하던 요네자와번이 항복한 일로 아이즈의 북측도 신정부군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또한 에치고와 국경에 진을 치고 있던 신정부군의 일부가 남하해, 아이즈 와카마츠성의 포위는 더욱 더 강대하게 되어, 여기서 신정부군은 성에 총공격 개시를 결정했습니다. 메이지 원년 9월 14일의 이른 아침 오야마다(小山田) 등 성의 남서쪽에 위치하던 하나바타케구치(花畑口)에 설치되어 있던 50문의 대포가 일제히 불을 발했습니다. 포탄에 명중한 혼마루는 큰 피해를 입어, 화약고가 있던 서 데마루도 수습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 때 어떻게든 성까지 3 km의 위치까지 와 분전 하고 있던 사가와 칸베에의 부대도 부득이 성 밖으로 물러납니다.


 그러나 여기에 와도 아이즈번의 사기가 약해지지 않는 것은 번주의 시조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의 가훈인 '다른 번은 어떻게되도, 이 아이즈번은 도쿠가와 쇼군에 충성을 다하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다음날인 15일 센다이번이 항복해도, 사기는 아직 쇠약해지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신정부군 참모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와 이치지 마사하루(伊地知正治)는 요전날 항복한 요네자와번을 통해 성의 북서 7 km의 위치에 물러나고 있던 아이즈번 가로 카야노 콘베에(萱野権兵衛) 앞으로 항복을 권고하는 서신을 보냅니다. 


 이제 음력 9월도 중순으로, 토호쿠에는 겨울의 기색마저 느껴져 이대로 포위를 계속하고 있으면, 신정부군도 다대한 피해가 나올 수 있었습니다. 또한 긴 원정으로 신정부군은 지치고 있었습니다. 농성 하는 5,000의 아이즈군에 대해 포위하는 신정부군은 30,000이었습니다. 게다가 공성전이 1달이나 지난 시점, 하지만 아직도 와카마츠성은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난공불락의 성인 와카마츠성은 깊은 미즈호리와 튼튼한 돌로 세워진 성곽을 지녀, 혼마루를 둘러싼 니노마루, 산노마루, 북 데마루, 서 데마루에는 전혀 사각이 없었습니다. 암스트롱포도 천수각에 타격을 줄지는 몰라도,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18일에는 타카다도 점거되어 이미 완전하게 고립해 버린 상황을 보고, 마츠다이라 가타모리는 드디어 개성을 결의합니다. 그의 명령에 스즈키 타메스케(鈴木為輔)와 안도 쿠마노스케(安藤熊之助)가 성의 북 오테몬(追手門)에 '항복'이라고 쓴 백기를 내걸었습니다. 이들은 칼을 가지지 않는 비무장인 채로, 코우가 마을의 거리에 설치된 항복의 식장으로 향했습니다. 기타모리는 직접 항복서를 전달해 항복의 뜻을 표명했습니다. 


마츠다이라 가타모리, 항복하다



 그 후, 일단 성으로 돌아온 기카모리가 죽은 사람들을 매장한 성의 외곽 후쿠헤이 쿠루와(伏兵郭)와 카라이도(空井戸)에 헌화와 기원을 바치자, 모인 중신, 성병들에게서 훌쩍거리는 울음의 소리가 퍼졌습니다. 저녁이 되어 기타모리 부자는 타키자와(滝沢) 마을에 있는 묘코쿠지(妙国寺)로 호송되었습니다. 철저 항전을 호소해 성밖에서 교전 중이었던 사가와 칸베에도 이 근신의 뉴스를 듣고 간신히 항복했습니다. 농성한 성병 약 5,000명 부녀자나 노인 약 500명은 다음날 성을 나와 이나와시로(猪苗代)로 향하기로 했습니다. 


 지금까지의 소란이 거짓말같이 조용한 밤을 맞이한 아이즈 와카마츠성 노랗게 빛나는 달빛에 비추어진 산노마루의 흰 벽에 한 여인이 비녀로 시를 써 내려갑니다.


あすよりは 何国の誰が ながむらん

내일부터는 어느 나라에 누군가 바라볼


なれし御城に 残す月影

성에 남기는 달빛


 그녀의 이름은 야마모토 야에(山本八重)입니다. 아이즈 전투가 벌어지자 학자로 전투에 참가하지 않으려는 남편과 이혼하고 남장해 입성했습니다. 그녀는 적의 불발탈을 분해해 분석하고, 성내에 군사들에게 포격술을 지도한 종횡무진의 활약을 한 사람입니다.


야마모토 야에



 와카마츠성의 낙성 뒤 쇼나이번도 항복해 토호쿠 보신전쟁은 종료합니다. 하지만 역적의 낙인이 찍힌 아이즈번은 '전번유형(全藩流刑)'으로 불릴만큼 가혹한 형벌을 받았고, 그 토지는 '시라가와 이북 한무더기가 백문이 채 되지 않는다'고 야유되는 굴욕을 맞봅니다. 원래 번주 가타모리가 교토 수호직에 제수되면서 세금을 많이 징수한 데다, 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이 동원되어 제대로 농사를 짓지 못해 결국 이 지역에서는 잇키가 연이어 발발하게 됩니다. 조상의 뜻을 이어 끝까지 항쟁한 그들이지만 그에 휘말린 영민들이 과연 행복했을 지는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