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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아이즈 전투(5) 쵸메이지 전투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아이즈 전투(5) 쵸메이지 전투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8월 29일 에도막부 말기에 벌어진 아이즈 전투 중 쵸메이지 전투가 있었습니다.


쵸메이지에 있는 전사자 묘



 신정부군에 의한 아이즈 와카마츠성의 포위망이 순조롭게 형성되었습니다. 아이즈번의 여군 부대를 이끈 나카노 타케코가 젊은 생명을 잃은 다음날 8월 26일에는 아이즈번 와카도시요리(若年寄) 야마카와 오오쿠라(山川大蔵)가 아이즈 코마츠의 맞은편 하야시타이(囃子隊)를 선두에 세워 당당히 적중을 돌파해, 망연하는 신정부군의 한가운데서 입성했습니다. 이로 성내의 아이즈군을 사기가 북돋아져 직후에 가로로 승진한 그는 후에 '지덕산천 오니 사가와(智恵山川 鬼佐川)'라 칭해질 정도의 군략의 재능을 발휘해 농성전의 지휘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물론 그 사이에도 신정부군에는 잇달아 원군이 달려 들어 병사의 수도 증가하고, 최신 병기도 도착했습니다. 26일에 혼마루를 사정거리에 둔 암스트롱포 8문이 동남쪽의 오다산(小田山)에 두었습니다. 당대 최강 병기인 암스트롱포가 명중할 때마다 성내에서는 사상자가 나옵니다. 물론, 성내에서도 군의를 해 가로인 카지와라 헤이마(梶原平馬)는 주군 마츠다이라 가타모리에게 요네자와 탈출을 제안합니다만, 같은 가로인 사가와 칸베에와 야마카와 오오쿠라는 맹반대해 철저 항전을 호소합니다. 결국, 향후의 방침은 철저 항전으로 정해져, 여기서 새로이 수비 편성이 짜여지게 되어 오오쿠라가 그 중심이 됩니다. 니노마루, 산노마루, 북 데마루, 서 데마루에 각각 가로가 지휘관으로 배치되어, 성밖을 통괄하는 역할에는 칸베에가 임명되었습니다. 이때까지 아직도 1,500 정도의 군세가 성밖에서 싸우고 있었습니다만, 현재의 상황을 타개할 수 있도록 오오쿠라는 새롭게 칸베에에 1,000 정도의 성병을 주어 에치고 가도 방면의 신정부군의 일소를 명했습니다.


위협적인 암스트롱포



 이렇게 해서 게이오 4년(메이지 원년, 1868년) 8월 29일 오전 7시 칸베에가 인솔하는 와카마츠 성병이 성의 서쪽에 위치하는 유우츠우마을 구치가쿠몬(融通寺町口郭門)에서 출격 해, 쵸메이지에 진을 치고 있던 신정부군의 조슈, 오카이, 비젠번의 군사를 공격했습니다. 한때는 쵸메이지를 점령할 기세였던 아이즈군은 신정부군이 가지는 강력한 병기로 곧바로 반격되어 금새 200명 가까운 사망자를 내 버려, 결과적으로 참패를 당해 버립니다. 이 후의 칸베에 등 성병은 소규모의 게릴라전을 시작해 나갑니다. 한편 신정부군은 성의 남서 2.5km 지점까지, 포위를 좁히게 됩니다. 게다가 9월  4일에는 함께 저항중이었던 요네자와번이 신정부군에 항복해 성의 주위에 자리잡은 대포도 50문으로 증가합니다. 


 그것들이 일제히 포를 발하자, 혼마루는 큰 피해를 입고 데마루도 괴멸 상태가 됩니다. 이윽고, 성벽 아래에서 싸우고 있던 성병의 대부분이 성내로 돌아오거나 10km이상 멀어진 장소로 철퇴해, 성벽의 아래는 신정부군에 제압되어 버립니다. 아이즈의 패배는 누가 보기에도 분명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이 되어도 아직 아이즈군은 항전을 결의합니다. 그들의 정신적 버팀목이 되는 것은 시조 호시나 마사유키(保科正之)의 「가훈」이었습니다. 호시나 마사유키는 2대 도쿠가와 쇼군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사생아로 3대, 4대 도쿠가와 쇼군을 보좌해 도쿠가와 가문의 주춧돌이 된 인물입니다. 그의 가훈의 1조가 바로 도쿠가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었습니다.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는 도망쳤지만, 아이즈번은 이 조상의 뜻을 기리며 끝까지 항전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