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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3) 고토 모토츠구 전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3) 고토 모토츠구 전사



 겐나 원년(1615년) 5월 6일, 오사카 여름의 진의 도묘지, 혼다 전투에서, 고토 마타베에 모토츠구(後藤又兵衛基次)가 장렬히 전사했습니다.



고토 모토츠구 초상화



 오사카 겨울의 진의 화목이 성립하고, 이번 여름의 진이 발발할 때까지 오사카성은 잠시동안의 평화를 맛보았습니다. 이 때 오사카 성내에서, 모토츠구의 등을 흘린 나가사와 쿠로베에(長沢黒兵衛)는 그의 전신에 무수한 도상, 피탄의 자취를 보아, 세어 보면 53곳이나 있었다고 합니다. 고토 모토츠구는 이렇게 이 눈 감으면 코 베어가는 전국의 세상을 창 한 개로 살아 남아 온 사나이엿습니다.


 그는 원래 쿠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각주:1]와 나가마사 부자를 시중든 중신이었습니다. 큐슈 정벌을 시작으로 임진왜란이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수많은 무공으로 오오쿠마성(大隈城) 1만 3천석을 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게이쵸 16년(1611년), 갑자기 쿠로다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나가사마사와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가마사의 시동을 맡고 있던 모토츠구의 아들 모토노리(基則)가 연회의 자리에서, 나가마사의 명령으로 소고(小鼓)를 친 것에 분노했다고 합니다. 이 이후로 나가마사와 그의 관계는 꺠어져 버립니다. 나가마사가 큐슈 정벌에서 실태를 범해, 반성의 표시로 머리를 밀자 '실패했다면, 뭇라면 죽음으로 갑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하거나, 나가마사가 적장과 싸우고 있을 때에, 도와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오사카의 진에서 용맹히 싸운 그의 모습



 물론 나가마사도 모토츠구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임진왜란의 한중간에 모토츠구가 호랑이를 베었을 때 '사무라이가 할 일인가! 군사를 베어라! 군사를...'이라고 화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견원지간인 둘 사이에서, 자신의 능력에 자신이 있었던 그는 '굳이 이대로 쿠로다 가문을 시중들지 않아도, 나 정도의 무장이니 다른 곳에서도 관직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한 뒤에 료닌[각주:2]이 되었습니다. 오구라의 호소카와 타다오키나, 히로시마의 후쿠시마 마사노리등이 그를 등용하려 했으나, 나가마사가 방해해 그는 임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게이쵸 19년(1624년), 호코지 종명사건(호코지 종명사건)이 발발해 도요토미와 도쿠가와의 사이에 불온한 공기가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오사카성에는 잇달아, 료닌들이 모이기 시작합니다. 쿠도산에 유폐 되고 있던 사나다 유키무라에게 사자가 방문한 것처럼, 모토츠구에도 '대장으로 맞아들일 뜻이 있다,'라는 통지가 옵니다. 여기서 호걸 고토 마타베에 모토츠구가 부활하게 됩니다. 그는 이제 마지막 주군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오사카성을 지키기 위해서, 생명을 걸어 싸우게 됩니다. 


 겐나 원년(1615년) 5월 6일, 한 발 앞서 오오사카성을 빠져 나간 그는 사나다 유키무라와 함께 도묘지 근처의 최전선에 진을 치고 도쿠가와군을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노도와 같이 달려나가다 무참하게 날아온 총알에 가슴을 관통 당해 장렬한 최후를 맞이합니다. 하지만 역시 그의 목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유키무라와 함께 히데요리를 데리고 사츠마로 도망쳤다고도, 몇년 뒤에 다시 교토로 돌아왔다고도, 시고쿠에서 온천을 했다고도 합니다.  현재의 오이타현에는, 그의 계명과 같은 이름의 묘가 있습니다. 이것이 맞다면, 그의 기일은 쇼오 3년(1654년) 1월 29일 입니다. 과연 그의 진실은 무엇인지, 알 수 없네요.

  1. 쿠로다 죠수이 [본문으로]
  2. 방랑무사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