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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7) 오사카성 총공격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7) 오사카성 총공격



게이쵸 20년((1615년) 5월 7일, 오사카여름의 진에서 도쿠가와의 오사카성 총공격이 개시되었습니다. 


 전날의 도묘지, 혼다의 전투, 카와치, 와카에 전투, 야오 전투에서 야전을 전개한 도요토미 측은 오사카성으로 퇴각합니다. 그 후, 도쿠가와 측은 대군으로 오사카성을 포위합니다. 이 시점에서 도쿠가와 측은 15만, 도요토미 측은 5만 5천의 군세였다고 합니다.


거의 세배의 군세로 적을 공격한 도쿠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 본대는 텐노지구치(天王寺口)에서, 히데타다 부대는 오카야마구치(岡山口)에서 총공격을 하는 일을 결정해 텐노지구치에는 혼다 타다토모(本多忠朝) 오카야마구치에는 마에다 토시츠네(前田利常)가 각각 선봉을 맡습니다. 이에 대하는 도요토미 측은 텐노지구치를 사나다 유키무라(真田幸村), 모리 카츠나가(毛利勝永), 오오노 하루나가(大野治長)가 방비를 굳히고, 오카야마구치에는 오오노 하루나가의 남동생 오오노 하루후사(大野治房)가 배치됩니다.


 전투가 개시된 것은 정오무렵. 우선은 도쿠가와 측의 텐노지구치의 선봉 혼다 타다토모와 도요토미 측의 텐노지구치의 선봉 모리 카츠나가대가 맞닥드립니다. 그것이 신호인것처럼, 오카야마구치에서도 전투가 개시됩니다. 사나다 유키무라가 인솔하는 3천의 군사는 마쓰다이라 타다나오(松平忠直)가 이끄는1만 3천의 군세였습니다. 어제 마쓰다이라 타다나오는 야오 전투에서 도도 다카토라,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의 격전을 눈앞으로 하고, 당황해 움직이지 않았던 것으로, 이야에스에게 일갈되어 심기일전한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사나다 유키무라는 적은 군세로 도쿠가와 이야에스의 목을 취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전국은 힘이 있는 이야에스를 따르고 있을 뿐, 그 구심점만 제거한다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습니다. 



도쿠가와의 목을 취하려던 사나다였지만....



 그런 사나다대는 별 볼일 없는 마쓰다이라대를 돌파하고, 그 뒤에 있던 이에야스의 본진으로 돌진합니다. '이쪽은 15만의 대군, 설마 자기 자신이 직접 적과 부딪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포진 하고 있던 이에야스는 크게 당황합니다. 심지어 이에야스의 주변에 있던 병사들도 모두 이에야스를 지키는 일을 방폐하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야에스을 지킨 오오쿠보 히코자에몬 타다타카(大久保彦左衛門忠教)는 '미카타가하라 이후의 최대의 위기'였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이 때의 상황은 도쿠가와 측의 무장들도 빠짐없이 '적이지만 대단하기 그지없다.'라고 사나다 유키무라를 절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향에 보낸 편지나 일기등이 '유키무라의 영웅 신화'를 만들었다고도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는 '사나다는 일본 제일의 군사이며, 옛날 이야기에도 없을 정도의 용사이다.'라고 했고, 호소카와 타다오키(細川忠興)도 '사나다와 고토는 고금에 유래없는 무장이다.'라 했습니다. 



안쿄신사의 동상과 비석



 하지만 군세는 고작 3천, 사나다의 명운도 다해 3번이나 공격했으나이야에스의 목은 자를 수 없고 사나다 유키무라는 패주합니다. 그리고 우연히 그를 발견한 마쓰다이라 타다나오의 가신 니시오 큐사쿠(西尾久作)가 그를 발견하고 공격해, 유키무라는 여기서 향년 49세로 목숨을 잃습니다. 현재, 시텐노우지(四天王寺) 근처에 있는 안쿄 신사(安居神社)에 '사나다 유키무라 최후의 땅'의 비석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오사카 근처의 사카이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무덤이라 전해지는 묘가 난슈지(南宗寺)에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때 고토 마타베에의 창에 상처를 입어 이야에스는 난슈지로 옮겨졌지만, 도착했을 때는 이미 죽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측근들이 가케무사등을 동원해 전국을 통일할 때까지 죽음을 숨겨두었다는 것이지요. 


 한편, 오사카측의 총대장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이번에 성밖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래봐야 사쿠라몬(桜門)의 앞이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때 이미 전황은 기울어 아군이 완패한 상태였지요. 히데요리는 '죽음을 각오해 적을 공격한다.'라고 했으나, 가신들의 반대로 저택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하지만 이미 전화는 오사카성까지 덮쳐 그날 밤 히데요리를 비롯한 오사카측은 성의 불길을 잡으며 힘겹게 잠들어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