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여름의 진(2)
오사카 여름의 진, 개전하다
겐나 원년(게이쵸 20년 1615년) 5월 6일, 오오사카여름의 진이 개전했습니다.
오사카 겨울의 진에서 11월 19일에 일어난 최초의 충돌로, 도요토미 측은 에타카사키(穢多崎) 성채를 빼앗겨 26일에는 이마부쿠, 시기노 전투(시기노, 이마부쿠 전투) 29일에는 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바쿠로우가후치, 노다, 후쿠시마 전투)에서도 성채를 빼앗겨 버렸습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러한 오사카성주변 국지전의 승리를 보고, 포위망을 좁혀 가려고합니다. 그리고 12월에 들어가 본진을 차우스산(茶臼山)으로 옮깁니다. 그리고 4일에 벌어진 사나다마루 전투(사나다마루 공방전)과 5일의 타니쵸구(谷町口) 전투에서도 전과를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16일에 반 단에몬의 야습(반 단에몬 야습)으로 오사카성측이 전공을 거둡니다. 그러다 오사카성 천수각이 피탄한 것을 계기로 강화를 맺게 됩니다.
후에 파괴되어 복원된 오사카성 천수각
하지만 도요토미 세력은 다음의 전투 준비를 계속하기 시작했고, 이 소식을 들은 이야에스는 다시 오사카성을 공격하기로 결정합니다. 4월 6일에 여러 무장에게 후시미성에 모일 것을 호소한 이에야스는 4월 12일 아들의 결혼식에 출석한 후, 슨푸에 돌아오지 않고, 그대로 서쪽으로 쇼군인 아들 히데타다와 함께 떠납니다. 양자는 4월 18일과 4월 21일, 연달아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4월 26일에 이야에스는 히데타다와 오사카 공격의 군의를 열어, 출진의 날을 5월 3일로 결정합니다.(하지만 3일에는 비가 왔기 때문에 후에 5일로 연기됩니다) 한편, 도요토미 측도 4월 13일, 도쿠가와를 맞아 싸우기 위한 군의가 열렸습니다. 이 때도 사나다 유키무라는 겨울의 진때와 같이 출격의 안을 제시합니다.(사나다의 비책) 유키무라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이전에는 난공불락이었지만, 지금의 성의 상황은 무리입니다. 게다가 상대는 이쪽의 몇배인 20만의 대군입니다. 일각이라도 빨리 수뢰에 상경받아, 후시미성을 점령해 우지(宇治), 세타(瀬田)에 전군을 집결시켜, 교토의 도쿠가와를 맞아 싸워야 합니다. 그러면, 아군이 되어 참전해 오는 사람도 나와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나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도 이 의견에 찬성했습니다. 하지만 겨울의 진과 같게 중신들의 대부분이 반대해 결국, 또 다시 농성 작전을 하게 됩니다. 이윽고 5월 5일, 이에야스와 히데타다는 출진합니다. 그 전의 4월 29일에는 이즈미 남부의 카시이에서 전투가 있어 반 단에몬이 분전 중에 전사하기도 했으므로, 이 날을 '개전의 날'이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도묘지(道明寺), 혼다(誉田) 전투가 있던 5월 6일을 개전으로 봅니다.
사나다 유키무라와 다테 마사무네의 대결!
최초부터 농성만 해서는 승산이 없다고 생각한 사나다 유키무라, 모리 카츠나가, 고토 모토츠구는 5일 밤에 밀담을 주고 받아, 그 날에 출진해 오사카를 향해 오는 도쿠가와군이, 다이와에서 오사카에 들어 올 경우에 반드시 통과할 길에 매복해 습격하는 작전을 세웁니다. 다음날인 6일 그들은 단독으로 출진합니다. 우선, 고토 모토츠구가 어젯밤의 논의한 대로, 도묘지 부근에 도착합니다. 이 부근은 길의 폭도 좁고, 길이 구불구불했기에, 여기서 습격하면 반드시 대혼란이 될 것이라 예상했습니다. 모토츠구는 2, 800의 군사를 인솔하고, 도묘지 서쪽에서 후지이데라(藤井寺)로 이동합니다. 하지만 아직 사나다 부대, 모리 부대는 오지 않았습니다.
실은 이 날 대단히 짙은 안개가 껴, 사나다 유키무라와 모리 카츠나가는 날이 샌 일을 눈치채지 못하고 군세를 출진시키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도쿠가와가 그들의 출진을 기다릴리가 없었지요. 모토츠구는 사나다, 모리 부대도 곧 근처에 도착할 것이라 믿고 공격을 결의해 여기서 도묘지, 혼다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이윽고, 간신히도묘지에 도착한 사나다와 모우리 부대가 본 것은, 모토츠구의 장렬한 전사였습니다. 게다가, 원군으로 향했던 스스키 다카네스케(薄田兼相)도 전사해 버렸습니다.
아리부스마 작전
하지만 시간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이윽고 다테 마사무네의 군이 도착합니다. 유키무라는 정면에서 부딪치는 일을 피해 '야리부스마(槍衾) 작전'을 결행합니다. '야리부스마'란 창을 가진 군사를 적의 예상 진로에 숨겨 두고, 적이 가까워져 우면, 일제히 창을 찌르는 작전입니다. 이 작전은 크게 성공해, 다테 부대에 많은 희생자가 나오고, 도망치는 사람이 속출했습니다.
한편, 이 날 야오(八尾), 와카에(若江)에서도 격전이 벌어졌습니다. 기무라 시게나리(木村重成)가 인솔하는 4,700의 군사와 쵸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가 인솔하는 5천의 군사가 그곳에서 분전 중이었습니다. 실은 그들은 유키무라와 함께 이에야스의 주력 부대를 도묘지 부근에서 습격할 수 있도록 출진했습니다. 하지만 도중에 와카에 부근에서 이이 나오타카(井伊直孝)의 부대와 마주지코, 쵸소카베 부대가 야오에서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의 부대와 조우해, 그 자리에서 전투가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이 전투에서는 기무라 시게나리가 전사하고, 초소카베 모리치카는 패주합니다. 이 전황을 들은 오사카성의 오오노 하루나가는, 아직 다테 부대와 분전인 유키무라에게 오사카성으로 돌아오도록 명령해, 결국 사나다 부대의 퇴각으로 이 날의 전투는 막을 닫았습니다. 이에야스는 겨울의 진때 전투가 길어진 것을 경계해 이번에는 '3일'이내에 결착을 지으려 합니다. 그리고 5월 7일, 오사카성의 앞에 도쿠가와의 대군이 결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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