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오사카 겨울의 진(1) 오사카성의 군의, 사나다의 비책
게이쵸 19년(1614년) 10월 10일, 사나다유키무라가 오오사카성에 입성해, 오사카성의 군의에 참것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 초상화
다음날인 10월 11일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슨푸에서 출진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움직임을 알게 된 히데요시의 군의가 있었습니다. 사나다 유키무라는 황금 2백매, 은3 백관, 50만석의 영주라고 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오사카성 에 들어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리는 아버지가 남긴 수많은 유산은 있지만, 정작 전투를 할 줄 아는 무장은 없었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서군의 무장들은 대부분 죽거나 료닌이 되었었지요. 그래서 오사카 겨울의 진의 전운에 히데요시 은고의 무장들이 구름처럼 몰려들 것이라는 히데요리의 기대와 다르게, 몰려온 것은 돈을 원하는 료닌뿐이었습니다.
초소카베 모리치카(長宗我部盛親), 모리 카츠미(毛利勝水), 아카시 타케노리(明石全登),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 센고쿠 히데노리(仙石秀範)등, 다이묘 클래스의 무장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이 현재는 료닌이었습니다. 실질적으로 당시 오사카성을 관장하던 오오노 하루나가는 실제 전투의 역량은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22살의 히데요리는 귀족과 다름없는 생활을 보내 왔기에, 총대장이 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습니다. 이에 요도도노가 말참견을 하지만, 오히려 방해만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바로 사나다 유키무라입니다.
유키무라의 비책은 '이에야스 부대가 오기 전에, 자신과 모리를 선봉으로 히데요리가 스스로 출진해, 그 사이에 고토가 후시미성을 점령하고, 우지, 세타에서 합류해서 도쿠가와군을 맞아 토벌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고토 모토츠구도 거기에 찬성해, '저와 사나다에게 2만의 군사를 맡겨 주십시오.'라고 호소합니다. 하지만 오오노 하루나가는 농성을 주장합니다. 아무래도 오사카성은 그 견고함으로 일본 제일의 성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시야마혼간지때부터 절대 점령당한 없고, 그 오다 노부나가마저 점령을 못한데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유산중 하나인 오사카성을 비운다는 것은 히데요리에게는 어불성설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천재적인 외성, 사나다마루
결국 군의의 결과, 농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유키무라는 이제 생각합니다.'서쪽은 바다, 북쪽은 요도가와(淀川), 동쪽은 헤이야가와(平野川), 남쪽은 가미마치다이지(上町台地)인 천연의 요충지, 난공불락의 오사카성을 공격한다고 하면 남쪽 밖에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한 유키무라는 오사카성의 남쪽에 외성(出城)을 구축합니다. 세방향에 해자를 파고, 약 2 m의 토루 위에 홑겹의 담과 삼중의 책을 쌓아, 데마루(出丸)에는 망루도 쌓아 올려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나다마루(真田丸)'로 불리는 것입니다. 이 사나다 마루의 엄청난 점은 적을 측면에서 공격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나다마루의 이야기는 오사카 겨울의 진의 다른 이야기에서 더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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