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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문화편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 무장의 취미, 다도

일본 전국시대 문화편; 
무장의 취미, 다도

 전국시대 무장들에게 다도는 엄청난 유행이었습니다.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의 엄청난 수 의 도공을 끌고 가기도 해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부릅니다. 또 오다 노부나가가 어째서 혼노지에간 이유 중 하나가 다름아닌 '다기'를 구하기위해서 였다는 설도 있지요.


이에사이(栄西)


 일본에 차가 전래된 것은 가마쿠라시대 이에사이(栄西)라는 스님이 중국을 방문해 일본에 돌아오면서 반입했다는 설이 일반적입니다. 한편으로는 나라시대의 스님, 교우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시즈오카에 있는 호우메이사의 본존불상을 조각하다 피로로 눈이 감기려는 교우키(行基)에게 한 할머니가 무언가를 내밀었습니다. 이것을 마시자, 피로는 씻은듯이 사라지고 눈이 번뜩 뜨여 조각을 마무리 했다고 합니다. 그가 마신것이 시즈오카에서 자생하던 차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 일화의 참거짓은 차치하고, 분명히 이 때까지는 차는 약으로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교우키(行基)스님이 조각한 불상


 하지만 무로마치 시대에 들어가 귀족들이 차를 마시기 시작하면서 마치 지금 와인의 산지를 맞추는 것 처럼, 차의 산지를 맞추는 것이 유행했습니다. 그러면서 차가 점차 고급화되었고, 동시에 하급차는 만백성 사이에서 유행하게 됩니다. 지배층을 따라한 것이지요.


다도의 창시자 무라타 슈코


 이런 차를 마시는 것을 다도라는 예술로 승화킨 것은 다름아닌 무라타 슈코(村田珠光) 라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선종과 다도를 융합하여, 차를 마시는 것을 선의 경지를 추구하는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제자인 다케나죠우오우(武野紹鷗)에 의해 다도는 한층 더 발전합니다. 그리고 센리큐(千利休)라는 사람에 손에 의해 다도가 완성됩니다. 그렇게 완성된 다도는 항구도시인 사카이에 유행하고, 이 유행은 곧 전국으로 퍼집니다. 

 다도는 어떻게 이렇게 유행할 수 있었을 까요? 먼저, 전쟁이 가득하고 하극상이 일반적이던 전국시대에 위안을 주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도는 정신에 위안을 준다'라 말하기도 했지요. 

 다음으로는 '교양의 척도'를 들 수 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가 다기에 집착한 이유를 오와리의 시골 무장으로서의 콤플렉스 때문이 아닌가 하는 시각에서 알 수 있듯이 이때의 다도는 하나의 교양의 척도 였습니다. 

또한 이런 다도이기에, '사교의 도구'로도 활용됩니다. 다과회의 뒤에는 보통 술을 마시거나 장기, 바둑을 두었습니다. 노부나가가 혼노지에서 다회를 연 다음에도 본원방의 바둑을 보았다고 하지요. 지금도 그렇듯이 이런 자리에서 중요한 일들이 결정됩니다. 그렇기에 다도는 전국 무장들에게 빠뜨릴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자폭하는 히사히데

 이렇게 되자 다기도 중요해졌습니다. 다도회를 할 때 좋은 다기를 피로하면 주위에서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은 당연했지요. 그렇기에 전국의 무장들은 더욱더 좋은 다기를 소유하는 것에 몰두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는 마츠나가 히사히데의 다기를 받고 반란을 용서해 주기도 했었지요. 그리고 두번째로 히사히데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도 다기를 요구했으나 히사히데는 다기에 폭약을 넣고(!) 자폭해 버립니다. 이토록 전국무장들은 다기에도 전념했었습니다. 

 요즘에도 셀러리맨들이 골프를 치고, 맥주한캔하고 찜질방에서 몸을 씻으며 친교를 다지지요. 전국시대의 다도도 이정도 역할을 했다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골프치다보면 좋은 골프채를 가지고 싶은 것이 전국시대 무장들의 다기 수집으로 나타난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