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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문화편

일본 전국시대; 잇키란 무엇인가?

일본 전국시대;

잇키란 무엇인가?


 조용하던 마을에 갑자기 종소리가 퍼집니다. 각자 생업(이라고 해도 주로 농업)에 종사하던 주민들은 급히 집회소로 향합니다. 향이 두번 타기 전까지 도착하지 않으면 결석으로 취급하기에, 주민들은 앞다투어 집회소로 향합니다. 집회소에 들어간 그들은 잇키를 결의하며 사발통문을 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동학농민운동 등 농민 운동, 항쟁이 일어날 때마다 썼던 것이기도 하지요. 


사발통문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사발통문이란 둥그런 사발을 두고 그것을 기준으로 빙 둘러 이름을 써 누가 주모자인지 모르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었습니다. 사발통문으로 쓰지 않았을 때는 목록에 끝에 '제비를 뽑아 순서를 정했습니다'라던가 '무순서'라고 적기도 했습니다.

보통 이 사발통문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치단결(잇키)한다. 우리는 위도 아래도 없이 모두가 동일하다. 우리는 무사나 귀족에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마을을 운영해 나갈 것이다. 규칙이나 법률도 스스로 정하고 시행할 것이다. 여러 역할을 맡는 장은 있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편의를 위해 있는 것일 뿐, 모든 일은 오늘처럼 모두가 논의해 진행한다. 자경단은 마을의 범죄를 정리하고, 그 재판도 스스로 할 것이다. 우리 마을의 존립을 위해 자경단을 운영하겠다. 만약 이들 중에서 전사자가 나온다면 마을의 장의 역할을 하는 이가 책임지고 보장한다.'


잇키세력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이런 사발통문을 쓴 뒤에 이들은 패각을 치면서 쟁기, 낫, 죽창, 봉등을 들고 도롱이를 지닌 채로 적황색(신분이 낮은 이들의 색이었습니다)의 옷을 입고 가마니를 둘러 매었습니다. 카가 잇코우 잇키 같은 경우는 종교적 성격도 있었기에, 여기에다 '나무아비타불'이라 적힌 기를 지녔습니다. 한편, 히로시마 잇코우 잇키는 '전자왕생극락, 퇴자무간지옥'이라는 살벌한 기치를 내걸기도 했습니다.

잇키에 참여하지 않는 집은...

 하지만 늘 그렇듯 이런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은 마을에서 철저히 무시당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마을에는 '십사'라 해 사람들이 서로 상부 상조하는이들이 있었는데 바로 출산, 성인식, 결혼식, 병, 장례식, 제사, 화재, 수재, 집의 공사 그리고 여행 중 부재였습니다. 잇키에 참여하지 않는 집은 이 중 화재와 장례식을 제외한 여덟가지 행사를 철저히 무시당했습니다. 화재는 불이 번지기 때문이고, 장례식은 죽은자에 대한 예우 차원도 있었지만, 시체를 놔두면 썩어서 냄새가 나기도 하고, 위생에 좋지 않아서 였겠지요. 

 이러한 잇키에 대해서 일본의 일부 학자들은 진정한 의미의 민주국가가 전국시대에는 존재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소규모의 잇키에서나 일치하는 말이고, 대규모 잇키에서는 자연스레 지도자가 나온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항쟁때는 눈에 띄는 지배자가 없기 마련이지요.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저항하는데 지도자가 있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오히려 잇키는 당시 농민들의 힘겨운 삶을 반영하는 것이 맞는 것 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