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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전쟁편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일본 전국시대 전투편;

전국시대의 전투는 백성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백성은 영주가 누구든 풀이 바람에 휘날리듯이 강한 측에 따랐습니다. 좋은 영주는 마을을 지켜, 그 안전을 보장하는  강한영주입니다.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경우 마을은 어떻게 되는 것 일까요. 「별본화광원일화한합운(別本和光院和漢合運)」에는 우에스기 겐신에게 함락된 히타치 오다성(小田城)에서 인질의 매매를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실 겐신은 인의의 상징, 비사문천의 화신으로 유명하지만, 이러한 인질 매매에 아주 적극적이었다고 합니다. 또 「묘법사기(妙法寺記)」에 따르면 다케다다군이사가미 공격으로 인질을 취했을 때, 그 친척들은 다케다가에 2관에서 10관의 금전을 지불해 인질을 되찾았습니다. 또 「려인부(旅引付)」에 의하면, 네고로중에 빼앗긴 아내를 되찾기 위해 백관을 내었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이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지요.



인질은 돈을 주고 되찾어 올 수 있었습니다



 마을사람들은 이러한 상황을 피하려고 필사적이었습니다.  에도시대에 쓰여진 전쟁의 교과서,「자츠헤이모노가타리( 雑兵物語)」는 집의 근처에는 비상시를 대비한 의복등이 파묻혀 있어, 그것을 파내는 것이 상식이었다고 합니다. 또 적의 영내의 전답을 베어 내는 일도 해야 한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전사 한 사람이 몸에 지니고 있던 칼, 투구와 갑옷 등은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허락되고 있던 것 같지만, 마음대로 약탈을 하면 엄벌에 처해졌습니다. 


 이 책에는 '푸른밭 망치기(青田をこねる)'라는 것이 실려 있습니다. 이것은 적지에 들어갔을 때, 모종을 심은지 얼마 안된 논을 밟아 망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 밖에도 적지에서 수확 직전의 벼를 베어 내는 것을 '푸른밭 사냥(青田狩り)', 적지에서 전답을 망쳐, 적을 유인하는 것을 '벼 베어 유인하기(刈田おびき)'라 부르고 있었습니다. 즉, 마을 사람들이 아무리 공들여서 농사를 짓더라도 전투가 한번 나 버리면 이렇게 모두 허탕이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푸른밭 망치기'제가 합성한 이미지라 이상하네요 ㅠ



 둘 이상의 세력에 둘러싸인 마을은, 복수의 상대에게 연공을 바치는 대신에 중립이 되는 것이 허락되었습니다. 이것을 '한노우(半納)'라고 했습니다. 공격이나 약탈을 면하기 위한 수단이었지요. 전투가 일어나면 어딘가에 아군에 속해야 했습니다. 영주는 한노우를 하는 마을이 전투 중에 적 측에 붙지 않게, 묘우슈(名主: 큰 자영농) 등 마을의 유력자의 아이들을 징병하려고 했습니다. 또 묘유슈 같은 유력자들은 아시가루(足軽)들을 고용하는 것으로 징병에 응해 마을사람이나 아이의 안전을 확보했습니다.


  전투가 일어나면 영주는 대신 근처의 주민을 거성에 넣어 그 안전을 보장해 주었습니다. 만약 백성을 살피지 못해 적병에게 대량으로 살해되었을 경우, 영주는 그 능력을 의심되게 됩니다. 마을사람은 식료나 재목을 가져 피난해, 성내의 쿠루와(曲輪: 성을 둘러싼 울타리)에 오두막을 지어 전투가 끝나는 것을 기다렸습니다.



쿠루와(曲輪)는 이렇게 위치합니다



 그런데 영주가 출진하면 영내의 방비가 허술하게 됩니다. 영주는 마을의 유력자들과 교섭해, 근린의 성의 방비를 의뢰했습니다. 마을사람은 영주에게서 자금이 지급되어 성에 들어가 방비를 굳혔습니다. 하지만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존망에 관련되지 않는 이상 영주끼리의 전투에 참가하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잘해야 본전이거든요. 거기서 영주는 자금, 은상의 지급으로 마을사람의 사기를 높여 집의 존망의 위기라고 고개를 숙여 여러 마을을 가세 시켰습니다. 동시에, 참가하지 않으면 목을 베겠다는 등 위협도 했지요.


  전투에 대비하기 위해, 영주는 거성의 보수를 실시했습니다. 마을사람도 성에 피난할 권리를 얻는 대신에, 보수에 참가할 의무를 가졌습니다. 재목이나 줄 등의 용재는 마을사람이 준비해, 마을 마다 할당해진 구획의 공사를 실시했다고 합니다. 공사비용은 영주가 전액 지불하지만, 주로 마을의 연공을 줄이는 것으로 대신했습니다.


 이렇듯 일반 민중에게 결코 전쟁은 달가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영주가 지배를 하던지 세금을 내는 데에는 변화가 없으나, 징병되고 전답을 망쳐졌지요. 그렇기에 영주들은 여러 수단을 사용해서 민중들을 전투에 이용하려고 했던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