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본 전국시대/인물편/여성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아들을 증오했던 어머니라고? 요시히메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아들을 증오했던 어머니라고?  요시히메



요시히메(義姫)는 모가미 요시모리(最上義守)의 딸로 다테 테루무네(伊達輝宗)의 정실입니다. 오토쿠노가타(お東の方)라고 불렸으며, 출가한 뒤에는 호슌인(保春院)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요시히메(義姫)일러스트



에이로쿠 7년 무렵, 모가미와 다테가는 항쟁 관계여서 이 긴장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그녀는 다테 테루무네와 정략결혼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에이로쿠 10년 후의 다테 마사무네가 되는 본텐마루(梵天丸)를 낳습니다. 본텐마루는 어려서 오른쪽 눈을 실명하게 됩니다. 이에 요시히메는 마사무네의 모습을 추악하다고 생각해 만지는 것마저 꺼렸습니다. 이윽고 둘재 아들 지쿠마루(竺丸)가 태어나자 마자 그녀는 지쿠마루에게 애정을 집중시켜 그를 다테의 후계자로 만드려 합니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자신의 용모에 열등감을 가진 마사무네의 소극적인 성격을 만드는데 한 몫 했습니다. 하지만 그 성격의 탓으로, 요리히메는 마사무네가 자신감이 결여되어 영주가 될 기량으로 보이지 않아 더욱 싫어 했습니다. 그렇지만 테루무네는 마사무네의 가능성을 알고 있었는지, 마사무네가 18살이 되자 영주직을 물려주고 은거합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하타케야마 요시츠구의 테루무네 납치사건이 일어납니다. 이때 마사무네는 아버지와 아버지를 납치한 범인들을 모두 총으로 쏴 죽여 버리지요. 이에 요시히메는 마사무네를 한층 더 미워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오라버니인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와 사이가 매우 좋아 편지를 자주 주고 받았습니다. 덴쇼 6년(1578년) 카미노야마 미쯔카네(上山満兼)를 남편인 테루무네와 요시아키가 공격했지만, 압도적인 불리상태에 빠졌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오라버니의 위기를 알고 다테의 진중에 나아가 '어째서 이렇게 정이 없는 형제 싸움을 하시는 것입니까'라며 호소해 철군시켰다고 합니다.


 요리히메가 시집온 이유는 다테가와 모가미가가 협력해 토호쿠의 패자가 되려 했던 것이나 마사무네가 집권하며 대립이 심해집니다. 모가미의 본가인 오사키가마저 마사무네가 공격하자 그녀의 꿈은 물거품이 되어 버립니다. 결국, 그녀는 자신의 아들인 마사무네를 암살하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릅니다.



악녀의 이미지가 매우 강하지요



  때마침 관서를 제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관동으로 눈을 돌려 오다와라의 호조를 공격하는데 다테도 참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출진을 앞두고 요시히메는 자식을 위해 작은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마사무네의 식사에 독을 넣었지요. 이때 먹던 음식의 맛이 다름을 느낌 마사무네는 음식을 뱉어 무사했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사실 요리히메가 아닌 마사무네의 자작극으로, 동생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자식을 죽이려는 악독한 요시히메의 모습은 후대에 만들어진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덴쇼 16년(1588년) 오오사키 전투에서 마사무네가 요시아키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을 때 그녀가 가마를 타고 나타나 오라버니에게 휴전을 호소했다고 합니다. 요시아키는 우세에 있는데다가 휴전을 하는 것은 다이묘답지 않다고 생각했으나, 사랑하는 동생의 설득에 휴전에 응했다고 합니다. 이때 그녀가 썼던 서신이 남아 있습니다.


 마사무네의 코지로 참살 후에도, 요시히메는 다테 가문에 머물며 모자는 친하게 서장을 주고 받았습니다. 그녀는 분로쿠 2년(1593년)에 임진왜란으로 조선을 침략하고 있는 마사무네에게 약간의 돈과 와카를 써서 보냈습니다.


あきかぜの たつ唐舟に 帆をあげて 君かえりこん 日のもとの空

가을 바람이 지나는 당선에 돛을 달아 그대가 돌아오는 해 아래의 하늘


이에 마사무네는 감동해 조선의 무명을 어머니의 선물로 정해 겨우 구한 뒤에 답장을 했다고 합니다.


ひとたび拝み申したく念望にて候

한번 문안드리고 싶습니다


모자가 편지를 교환했던 다음 년의 분로쿠 3년(1594년), 마사무네의 스승인 코사이 소이치(虎哉宗乙)로부터 교토(京都)에 있는 마사무네의 대숙부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11월 4일에 요시히메가 이와데야마(岩出山)에서 출분해 야마가타로 돌아갔다고 한다. 출분의 이유나 경위는 알 수 없으나, 마사무네의 부재중에 불쾌한 사건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게이쵸 5년(1600년), 오우우에서는 게이쵸 데와 합전이 발발했다. 이 때, 마사무네는 모가미 요사아키로부터 원군을 요청받았고, 요시히메도 마사무네에게 원군을 급히 보내라는 서장을 보냈습니다. 마사무네의 가신인 가타쿠라 카게츠나(片倉景綱)는 모가미 세력과 적군이 피폐해지는 것을 기다려야 한다고 방관자세를 취할 것을 진언했으나, 어머니의 안부를 염려한 그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원군을 파견했다고 합니다. 단, 파견된 군세는 전황을 방관하긴 했다고 합니다.



정말로 악녀였을까요?



게이쵸 19년(1614년)에 요시아키가 죽었다. 요시히메는 오빠의 사후, 모가미 가문이 완전히 양상이 바뀌었다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그 후의 내분에 의해 겐나 8년(1622년)에 모가미씨가 개역당하자, 요시히메는 갈곳을 잃었습니다. 그녀는 마사무네를 의지해, 겐나 9년(1623년) 그의 거성 · 센다이성(仙台城)에 들어가 삭발하고 불문에 들어갔습니다. 이 무렵의 호슌인은 눈과 다리가 나빠지졌지만, 에도에 있는 마사무네의 정실 · 메고히메(愛姫)에게 수제의 주머니를 줘서 감동시켰다고 할 정도로 며느리와의 사이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이 해에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납니다. 마사무네는 칸에이 12(1635년), 어머니의 13번째 기일이 되자 그녀를 조상하려호슌원을 건립했습니다.


 이런데 그녀가 아들을 싫어해 죽이려고 까지 했다는 이미지는 너무한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