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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선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 패퇴! 카츠누마 전투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신선조 패퇴! 카츠누마 전투 게이오 4년(1868년) 3월 6일 곤도 이사미(近藤勇)가 인솔하는 코요 친부타이 (甲陽鎮撫隊)가, 이타가키 타이스케(板垣退助)가 인솔하는 신정부군과 코슈 카츠누마에서 격돌한 카츠누마 전투가 있었습니다. 게이오 4년(1868년) 1월 3일에 발발한 토바 후시미 전투에서 진 막부군은 1월 6일에 막부군의 대장인 15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오사카성을 탈출한 일을 눈치챈 제 번의 장병들은, 1월 7일~8일에 걸쳐 차례차례로 오사카성을 뒤로 합니다만, 9일에는, 오오사카성 탈출을 납득 하지 못하고, 성과 함께 전사 할 각오인 잔류한 병사들에 의해 불이 발해져 오사카성은 불길에 싸였습니다. 이 때, 오사카만을 출발해 에도를 목표로 한 막부 군함에는 신선조의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의 분열, 아부라코우지의 변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신선조의 분열, 아부라코우지의 변 게이오 3년(1867년) 11월 18일, 원래 신선조에 속했던 고다이지당(高台寺党)의 이토 코우지 타로우(伊東甲子太郎)가 신선조에 습격당해 목숨을 잃은 '아부라코우지의 변'이 있었습니다. 히타치 시즈키번 출신인 이토 코우지 타로우는 겐지 원년(1864년) 11월 친구인 토도 헤이스케(藤堂平助)의 소개로, 남동생 스즈키 미키사부로우(鈴木美樹三郎) 등 7명과 함께 신선조에 입대했습니다. 입대한지 얼마되지않아 참모라는 요직에 발탁 되어 대장인 곤도 이사미(近藤勇)에게 중용 됩니다만, 원래 미토나 에도에서 학문이나 검술을 배우고 있었을 무렵으로부터 그는 존왕양이이었고, 막부측의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신선조에 들어간 걸까요? 원래 친구였던 토도..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에 의해 이케다야 사건 발발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신선조에 의해 이케다야 사건 발발 겐지 원년(1864년) 6월 5일, 신선조가 교토의 여관 이케다야에 모인 존왕양이파 지사를 급습한 이케다야 사건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존왕양이(尊王攘夷)나 공무합체(公武合体)로 두 동강이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조정 내에서도 역시 둘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공무합체파인 나카가와노미야 아사히코 친왕(中川宮朝彦親王)은 공무합체파인 아이즈번, 사츠마번과 협력해, 존왕양이파의 공경 산조 사네토미(三条実美) 등 7명을 고쇼에서 내쫓아, 교토에서의 퇴거를 명합니다. 이것이 8월 18일의 정변으로 불리는 쿠데타입니다.(8월 18일의 정변) 교토에 있을 곳이 없어진 사네토미 등은 존왕양이파의 조슈번을 의지해 교토에서 탈출합니다. 이것으로 정치의 중심으로부터 ..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신선조의 전신, 로시구미 결성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신선조의 전신, 로시구미 결성 분큐 3년(1863년) 2월 27일은 신선조의 전신인 '로시구미(浪士組)'가 결성되었습니다. 新撰組라고도도 하고, 新選組라고도 합니다. 국장인 콘도 이사미(近藤勇)도 둘 다 썼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옳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습니다. 둘다 맞다고 할 수 있죠. 신선조는 원래 쇼군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가 상경하기에 즈음해, 그 경비를 담당할 사람을 넓게 모집한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200명 정도의 섦길 영주를 잃은 무사들이 모여, 쇼군을 옹립해 교토로 향합니다. 그러나 교토에 도착한 뒤, 이 조직의 우두머리였던 쇼나이번의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가 근황파(勤皇派)와 통해 료딘들을 덴노의 부하로 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 발각되었습니니다. 이로 인해.. 더보기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키요카와 하치로의 최후와 신선조의 탄생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키요카와 하치로의 최후와 신선조의 탄생 분큐 3년(1863년) 2월 23일 에도에서 모집한 료닌을 인솔해 상경한 키요카와 하치로(清河八郎)가 료닌들의 앞에서, 존왕양이의 의사를 표명했습니다. 카에이 6년(1853년)의 페리 내항(페리 내항)으로, 개국인가 양이인가의 두 조각으로 나누어진 일본은 다음 해, 다시 일본에 방문한 페리에 의해 미일 화친 조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다음의 과제 미일 통상조약과 차기 쇼군 문제로, 막부는 두동강이 됩니다. 당대의 쇼군은 제13대 도쿠가와 이에사다였지만 그에게 아이가 없었기 때문에, 차기 쇼군으로 옹립 된 것은 기슈의 도쿠가와 이에모치(徳川家茂)와 미토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아들로, 이치하시 가문의 양자가 되었던 도쿠가와 요시노부(徳川慶喜)였습..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