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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 데루모토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츄고쿠의 패자, 모리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츄고쿠의 패자, 모리 가문 일본 전국시대 최고의 다이묘를 손꼽자면 절대 빠질 수 없는 것이 모리 모토나리입니다. 지략과 모략으로 일개 토호에서 시작해 츄고쿠를 재패하는 대 다이묘가 된 모리 가문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모리 가문의 성립 모리 가문은 계도에 따르면 아메노호히노미코토(天穂日命)를 선조로 삼고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그냥 다이묘들이 자신의 가계를 신성화 시키기 위해 만들어낸 것으로, 실제로는 오오에(大江)가문이 선조인듯 합니다. 그 자손들 중 사가미의 모리장(毛利庄)을 영유하며, 토지의 이름을 따서 '모리' 를 자칭하게 됩니다. 하지만 다른 가문들에게 밀려 츄고쿠 아키국의 요시다장의 지도우(地頭)가 되어, 여기서 츄고쿠에서의 모리 가문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모리 가문의 중..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데루모토, 히로시마성에서 출진하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모리 데루모토, 히로시마성에서 출진하다 게이쵸5년(1600년) 7월 15일, 삼봉행(三奉行)의 연서장(連署状)을 받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오사카로 향해 히로시마성을 출진했습니다. 게이쵸 3년(1598년) 어린 히데요리를 오대로와 오봉행에게 맡겨, 도요토미 히데요는 죽었습니다.(히데요시의 유언) 마에다 토시이에가 중재하던 동안은 어떻게든 밸런스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죽음과 함께, 도요토미 가신단의 톱이 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가를 경시하기 시작합니다. 이를 두고볼 수 없었던 오봉행의 한 사람인 이시다 미쓰나리는 이에야스를 배제할 결의를 굳힙니다. 이것이 바로 세키가하라 전투입니다. 게이쵸5년(1600년) 정월에, 오대로의 한 명인 우에스기 키게카츠가 연하 인사를..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병상의 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병상의 히데요시, 유언을 남기다 게이쵸 3년(1598년) 8월 9일, 병상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도쿠가와 이에야스나 마에다 토시이에등을 불러, 히데요리의 장래와 조선에서의 철군을 맡겼습니다. 이 해의 5월 부터 컨디션이 무너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서서히 악화되는 병에, 자신의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꼈습니다. 그는 거성인 후시미성(伏見城)에 여러 다이묘를 소집해 나라의 장래나, 아들인 히데요리의 장래에 대해서 여러가지 유언인 듯한 부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게이쵸 3년 8월 9일, 병상의 히데요시는 사방침(팔꿈치를 걸치는 배게)에 의지하면서 일어 납니다. 그 앞의 왼쪽으로는 도쿠가와 이야에스, 마에다 토시이에, 다테 마사무네, 우키타 히데이에가 앉아 있었고, 오른쪽으로는 모리 데..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제2차 갓산토다성 공방전(1) 사슴과 늑대의 사투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제2차 갓산토다성 공방전(1) 사슴과 늑대의 사투 에이로쿠9년(1566년) 갓산토다성을 포위중인 모리 모토나리가 항복을 신청한 아마고 요시히사의 생명을 보전해 줄 것을 약속했습니다. 쿠니진에서 어느덧 전국 다이묘로 발을 내딛고 있는 모리가, 이번에는 아마고가를 목표로 정합니다. 전국 굴지의 책략가 모토나리는 먼저 이와미 은광을 점령해 자금줄을 끊고(이와미 은광 쟁탈전), 하쿠로쿠성을 점령해(하쿠로쿠성 공방전) 주위의 성들을 손에 넣습니다. 이제 고립된 갓산토다성을 모토나리는 3만이라는 대군을 이끌고 포위합니다. 에이로쿠8년 처음으로 출진한 모토나리의 손자 테루모토(輝元), 모토하루(元春)와 차남 모토하루(元長)의 아들 킷카와 모토나가(吉川元長)가 합류해 이 전투의 주역이 모두 모였..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 모리 데루모토의 히로시마성 축성시작 일본 전국시대 역사편;모리 데루모토의 히로시마성 축성시작 덴쇼 17년(1589년) 4월 15일, 모리 데루모토가 히로시마성의 축성에 착수했습니다. 선대 모리 모토나리의 '화살 세 대의 가르침(三矢の教え)으로 유명한 아키의 전국 다이묘 모리 가문. 그 모토나리가 아마고 가문의 일개 고쿠진이었을 무렵으로부터, 산요, 산인에 일대 세력을 자랑하는 대영주가 되고, 그 손자 데루모토가 뒤를 이은 때까지, 모리의 본거지는 쭉 코오리야마성(郡山城)이었습니다. 코오리야마성은 산간에 만들어진 산성으로, 그 지형을 살려 난공불락이라고 구가해진 견고한 성입니다. 모토나리가 아마고 가문에서 독립하는 계기나 된 아키산성 공방전에서도 오오우치의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4개월간, 아마고의 총원 3만이라고 하는 대군을, 불과 8천으로..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 어머니는 위대하다, 오자키노쯔보네 일본 전국시대 여성 인물편;어머니는 위대하다, 오자키노쯔보네 오자키노쯔보네(尾崎局)는 나이토 오키모리(内藤興盛)의 딸로 모리 다카모토(毛利隆元)의 정실입니다.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쯔와노보네(津和野局)를 낳습니다. 그녀는 나이토가에서 태어났지만, 주군인 오오우치가문의 양녀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리고 당시 아키에서 크게 성장하고 있던 모리 모토나리의 장남 다카모토의 정실로 시집을 가게 되지요. 코우치 3년(1557년)에 오오우치가 멸망합니다. 그리고 에이로쿠 6년(1563년)에는 남편인 다카모토가 급작스레 세상을 떠나지요. 그녀는 어린 데루모토의 양육에 전념합니다. 겐키 2년(1571년) 모토나리가 죽었을 때 데루모토의 삼촌인 킷카와 모토하루와 코바야카와 다카카게에게 데루모토의 후견인이 되기를 요청하..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의 츄코쿠 대귀환 타카마츠성 공방전 일본 전국시대;히데요시의 츄코쿠 대귀환타카마츠성 공방전 덴쇼 10년(1582년) 츄고쿠 지방의 공략을 진행시키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빗츄 타카마츠성을 공격했습니다. 천하통일을 눈 앞에 둔 오다 노부나가는 덴쇼10년(1582년) 가이의 다케다를 멸망 시켜(다케다가 멸망하다), 드디어 남는 강적은 츄고쿠 지방뿐이었습니다. 츄고쿠 지방의 평정을 맡은 하시바 히데요시는, 덴쇼 8년(1580년)에 하리마, 미츠키성을(미키성 농성전), 다음 9년(1581년)에 돗토리성(돗토리성 점령)을 점령해 드디어 덴쇼 10년(1582년) 빗츄까지 진군합니다. 도중에 비젠 오카야마 성주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가 아군에 되어(2차 코우즈키성 공방전) 사기 충전한 히데요시군은 타카마츠성(高松城)을 목적으로 정해 덴쇼10년..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돗토리성을 점령해 모리를 내쫓다 일본 전국시대;히데요시, 돗토리성을 점령해 모리를 내쫓다 덴쇼 9년(1581년) 모리의 돗토리성(鳥取城)을 하시바 히데요시가 인솔하는 오다의 군세가 포위했습니다. 오다 노부나가의 명령을 받아, 츄고쿠 지방을 공략하고 있던 하시바 히데요시는 덴쇼 6년(1578년) 봄부터, 2년 가까이의 세월을 걸쳐 겨우 벳쇼 나가하루의 거성 미키성을 공략합니다.(미키성 농성전) 미키성을 공략하면서, 히데요시는 타지마나 이나바의 평정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미키성이 함락당하기 직전 히데요시는 당시의 돗토리 성주였던 야마나 토요쿠니(山名豊国)에 '이나바국의 영지를 보증할 테니 오다측으로 오지 않겠는가?'라는 권유를 했습니다. 야마나 토요쿠니는 오닌의 란에서 서군의 장이었던 야마나 소젠의 자손입니다. 이전에는 산인의 수십국을 ..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오다 수군의 설욕전, 제 2차 키즈가와구 해전 일본 전국시대;오다 수군의 설욕전, 제 2차 키즈가와구 해전 덴쇼 6년(1578년) 오다 노부나가와 이시야마 혼간지의 전투의 승패를 결정하는 제2차 키즈가와구 해전이 있었습니다. 반노부나가 동맹도 거진 반 깨어질 무렵, 새로이 참전한 모리 데투모토의 1차 키즈가와구 해전( 키즈가와구 해전)은 오다 노부나가에게 충격을 안겨줍니다. 결국, 노부나가는 이에 대항하기 위해 철갑선을 만들어가지요. 때마침 우에스기 겐신이 죽어(겐신 사망) 에치고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노부나가는 이시야마혼간지와 모리로 타겟을 정합니다. 하지만 돌연 아리오카성의 아라키 무라시게(荒木村重)가 반기를 들어 버립니다. 아리오카성은 혼간지에서 가까운 성이기 때문에 오다군이 해상을 봉쇄해도, 육로에서 지원을 할 수 있게 되자 노부나가는 급히.. 더보기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 포위망을 펼치다, 미키성 농성전 일본 전국시대;히데요시 포위망을 펼치다, 미키성 농성전 덴쇼 6년(1578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다 노부나가에 반기를 든 벳쇼 나가하루(別所長治)의 거성 미키성(三木城)을 포위했습니다. 덴쇼의 초 무렵에 오다 노부나가는 하시바 히데요시를 대장으로 하는 토벌군을 편성해 산요, 산인지방을 평정하게 했습니다. 그로 인해 차츰 하리마의 여러 영주들은 오다 측으로 붙게 되었지요. 덴쇼 3년(1575년)에는 벳쇼 나가하루 도 노부나가에게 직접 찾아가 오다 측으로 가담할 것을 신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덴쇼 6년(1578년) 초에 나가하루는 돌연 오다측에 일방적으로 지지철회를 선언해, 거성 미키성에서 농성합니다. 그 이유는, '노부나가의 잘난척을 견딜 수 없었다', '히데요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라는 여러가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