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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유신시대/역사편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카모토 료마 암살당하다

일본 유신시대 역사편;

사카모토 료마 암살당하다



 게이오 3(1867년) 11월 15일 오후 8 시에 교토 시조가와하라 마을(四条河原町)의 간장상점 오우미야(近江屋)에 잠복 하고 있던 사카모토 료마와 나카오카 신타로우가, 수 명의 자객에게 습격당해 료마는 즉사, 신타로우는 2일 후에 사망했습니다. 기이하게도, 이 날은 료마의 32번째의 생일이었습니다.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는 일본 역사상의 인물중에서도 1위, 2위를 다투는 인기인입니다. 그는 견원지간이었던 사츠마번과 조슈번을 중개해, 삿초 동맹 성립시켰습니다.(삿초동맹) 또, 토사 번이 막부에 제출한 대정봉행을 추진해, 후의 일본을 디자인한 「건백서(建白書)」의 원안을 생각했던 것도 료마입니다.(삿토맹약) 이 두가지 큰 업적에 대해 최근에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부정설도 나오는 것 같습니다만, 근대 일본을 만든 료마, 그런 그는 이 날 32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암살당하고 맙니다. 도대체 그를 암살한 것은 누구인가. 에도막부 말기 사상 최대의 수수께끼라고까지 말해진 사건입니다. 사건 당시는 신선조의 조업으로 여겨지고, 메이지시대에 들어가 미마와리구미(見廻組)의 이마이 노부오(今井伸郎)가 자백해, 정리된 사건입니다만, 최근에 들어와서 사건의 상세나 암살범의 추리에 대해 의문이 탄생한 것입니다. 


 메이지 3년(1870년), 미마와리구미의 이마이 노부오가 진범은 리더 사사키다 유우사부로(佐々木唯三郎) 이하 자신을 포함한 7명이 미마와라구미로, 료마를 암살한 일을 자백합니다. 료마 암살에 관한 공문서는 이 때의 「오사카베성구서(刑部省口書)」뿐입니다. 그 밖에 사료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은 모두 에도 막부 말기의 동란으로 사망해, 살아 남은 이마이가 자백하고 형을 살았기 때문에, 당연히 사건은 여기서 일건낙착됩니다. 그 후의 료마 연구에서도, '자객은 미마와리구미'로 단정하고 있기에, 전혀 수수께끼로서 다루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이때까지는 료마는 전혀 중요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삿쵸 동맹, 건백서의 원안인 「선중팔책」은 수면에서 행해진 것입니다. 즉, 역사의 전면에서 료마가 나서는 일은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에는 교토 주위를 배회하는 료닌이었던 것에 불과합니다. 


여섯명의 암살자의 한 장면



 암살을 자백한 이마이 노부오를 사이고 다카모리가 이마이의 조명을 위해서 분주 했기 때문에 여기서 '사츠마 흑막설'이 태어납니다. 그리고 이 사츠마 흑막설을 기반으로 한 영화 여섯 명의 암살자(六人の暗殺者)가 쇼와 30년(1955년)에 상영되어 여기서 처음으로 료마가 세간에 알려지기게 됩니다. 그리고 쇼와 44년에 토사번의 고토 쇼지로우(後藤象二郎)를 흑막으로 한 미요시 도오루(三好徹)의 추리소설 「료마 암살 이문(竜馬暗殺異聞)」이 발표됩니다. 이런 일로 역사의 뒤안길에 있었던 사카모토 료마는 전면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됩니다.


 사실 이마이의 자백이 계속해서 바뀌거나 그 자백이 나가오카 신타로우의 말과 다르거나 해서 의혹이 있었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누가 료마를 죽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