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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오오우치가 몰락의 서막, 다이네이지의 변

일본 전국시대;

오오우치가 몰락의 서막, 다이네이지의 변




 텐몬 20년(1551년) 스오우의 전국 다이묘 오오우치 요시타카의 중신 스에 타카후사(陶隆房)가 군사를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다이네이지(大寧寺)의 변으로 불리는 전투 입니다.



스에 타카후사 동상



  오오우치가는 백제의 임성태자(琳聖太子)의 자손입니다. 스오우의 '오오우치'를 본거지로 했기 때문에, 오오우치라고 자칭하게 됩니다. 메이토쿠 2년(1391년) 경에는 서쪽으로 세력을 늘려 대대로 오오우치가의 당주가 스오우의 수호를 맡게 됩니다. 제29대 당주인 오오우치 마사히로는 오닌의 난에서 활약하고, 제30대 당주인 오오우치 요시오키는 관령 호소카와가의 싸움에 관여하는 등 중앙에서도 경의를 표해지는 가문이 되어 갔습니다. 교로쿠 원년(1528년)에, 그 요시오키에 이어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31대 당주가 됩니다. 텐몬5년(1536년)에 큐슈 북부에 세력을 자랑하고 있던 쇼니 스케모토(少弐資元)를 격파하고 그 다음 해에는 분고의 오오토모 요시아키(소린의 아버지)와 화목을 맺어, 동맹 관계에 있는 류조지 요시아키(大友義鑑; 타카노부의 양부)를 히젠의 수호대에 앉혀, 쇼니가의 세력을 완벽하게 억제했습니다. 


 이렇게 한때는 일본의 6분의 1, 10개국을 장악 하는 대영주가 된 요시타카는 적대하는 이즈모의 아마고가에게서  등을 돌려 오오우치가로 들어온 모리 모토나리에게 분노한 아마고 하루히사에게 아키 코오리산성(郡山城)을 공격받은 텐몬 9년(1540년), 중신인 스에 타카후사(陶隆房)를 파견해 아마고가를 패퇴시켰습니다. 잠깐 스에 타카후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스에는 원래 오오우치씨의 일족으로 헤이안 시대의 후기 초대 당주가 되는 히로가타(弘賢)가  스이에 이주해서 성으로 스이를 자칭하게 되어 남북조의 무렵 대대로 스오우의 수호대를 맡아 수호의 오오우치가를 지지한 가문입니다. 특히, 오닌의 난의 무렵부터는 중앙정부에까지 개입하게 된 오오우치가가 종종 상경해 스오우를 비우기 때문에 나라에서 일어난 혼란을 해결하는 것은 거의 이 수호대의 역할이었습니다. 상경한 주군이 위기에 빠질때에는 곧 바로 도우러 갔지요. 스에가문은, 오오우치가에게는 없으면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타카후사와 연인이자 주종관계인 오오우치 요시타카



 게다가 이 요시타카와 타카후사는 전국시대에는 흔한 남자 연인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타카후사를 만나고 싶어진 요시타카가, 5시간이나 말을 몰아 만나러 갔지만, 우연히도 타카후사가 지쳐서 자고 있어서 그 잠자는 얼굴을 본 요시타카는 '일으키지 말자'라고 생각해, 살그머니 머리맡에 와카(和歌; 일본 시) 를 놓고 돌아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사이가 좋았기 때문일까요? 이런사이일수록 사이에 균열이 생기면 수복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어 버리는지도 모릅니다. 그 조짐은 텐몬 11년(1542년)부터 다음 해에 걸친 갓산토다(月山富田)성의 공방전의 무렵에서 보이기 시작합니다. 갓산토다성은 오랜 세월의 라이벌 아마고가의 거점인 성입니다. 


 이 전해에 아마고 당주 하루히사의 조부로, 아마고가를 츄고쿠 11국을 지배하는 강성 영주로 만든 영웅 아마고 쓰네히사(尼子経久)가 죽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기회에 공격해야 한다는 고쿠진들의 의견을 들어 요시타카는 스스로 대군을 인솔해 진격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공방전이 시작되면 의외로 성의 공략에 시간이 걸리는데다가 진영 내에서 작전에 대해 대립이 격화되어 이에 실망한 고쿠진들의 배반도 겹쳐 결국 요시타카는 출병으로부터 1년 반 후의 텐몬 12년에 철퇴를 개시했습니다. 그런데 그 퇴각의 도중에 배 1척이 전복해 버리는데 우연히 그 배에 탑승하고 있던 적자 하루모치(晴持)가 익사해 버립니다. 일설에는, 이 사건의 충격에서 회복하지 못한 요시타카는 정치를 돌아보지 않게 되어, 타카후사를 비롯한 중신들과의 사이에 균열이 생겨 버렸다고합니다. 


 원래 요시타카는 학문이나 문예에 조예가 풍부하고 교토의 문화를 좋아한 했으며 외국과의 교류에도 열심이었고 크리스트교의 포교도 허가했습니다. 그 덕에 당시의 야마구치는, 서쪽의 교토라고 불릴 정도로 문화의 꽃이 피었습니다. 다만, 일부의 중신에게 있어서 요시타카의 지나친 수도 찬양이 눈에 거슬렸다고 하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반대로, 갓산토다성 공격에 적극적이었던 타카후사를 요시타카가 피했다고 하는 이야기도있지요. 게다가 당시에는 정치를 맡고 있던 사가라 타케토우(相良武任)와 군사를 맡는 타카후사 사이의 대립도 있던 것 같습니다. 이 무렵 타케토우를 정치 뿐만 아니라 사적으로도 총애 하기 시작한 일에, 타카후사가 분노 했다고 하는 소문도 있었지요.



다이네이지



 어쨌든, 이 대립에서 신변의 위험을 느낀 타케토우가 일을 꾸며 모든 책임을 무투파에 돌리고 그것을 믿은 요시타카가 완전무장을 한 채로 무투파에 힐문하자 둘의 관계 사이의 균열은 결정적으로 벌어집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타케토우는 그대로 큐슈에 도망쳐버리고, 타카후사는 드디어 행동을 일으킵니다. 텐몬 20년(1551년) 요시타카는 한 때의 부하이자 연인인 타케후사가 군사를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타카후사는 야마구치를 습격합니다. 이 때, 요시타카를 조력한 것은 측근인 레이세이 타카토요(冷泉隆豊)를 포함한, 불과 2000명 정도인 반면, 타카후사에는, 무투파 중심으로 1만명의 군세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이 숫자만 봐도 이미 가신들의 마음은 요시타카에게서 떨어져 있던 일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요시타카는, 저항같은 저항도 못한채 나가토에 패주해 거기서 배를 타려했지만, 폭풍우 때문에 배를 타지 못하고 다이네이지에서 할복합니다. 그 다음날에는, 아직 7세 불과했던 요시타카의 아들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尊)도 살해당해 여기에 오오우치씨의 본가의 혈통은 멸망 했습니다. 이후 타카후사는 한때 요시타카의 양자가 되고 있던 일이 있는 오오토모 소린의 동생 요시나가(義長)를 분고로부터 귀환시켜 당주로서 맞아들입니다. 물론 실권은 타카후사가 잡고 있지요. 이 상황을 조용히, 하지만 자세히 살피고 있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모리 모토나리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