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아시카가 타카우지 입경하다
겐코 3년(1333년) 4월 16일, 다시 막부에 반기를 든 고다이고덴노를 토벌 하기 위해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高氏)가 교토에 들어갔습니다.
아시카가 타카우지 초상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가마쿠라에서 연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도, 합의제 아래 요리토모 계열의 쇼군은 불과 3대로 끊어져, 그 다음은 이름뿐인 쇼군을 공가들이 임명해, 실질적으로는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北条政子)의 친가인 호조 가문이 집권해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쇼와(正和) 5년(1316년), 제14대 쇼군으로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가 취임합니다. 그런데, 그 2년 뒤에 제96대 덴노로 즉위 한 고다이고덴노는 현 정권에 불만을 가져, 덴노의 친정을 목표로 해 은밀하게 획책합니다.
이윽고,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라고 하는 아군을 얻은 고다이고덴노는 겐코 원년(1331년) 가사기산(笠置山)에서 군사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는 실패로 끝나 겐코의 변은 종결합니다. 그러나, 그 1년 뒤의 겐코 3년(1333년) 윤 2월 고다이고덴노의 황태자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이 각지의 반막부 세력을 정리하고 요시노산에서 봉기해, 다시 토벌 막부의 봉화를 들자, 몸을 숨기고 있던 마사시게가 치하야성에서 군사를 일으킵니다.(치하야성 공방전) 물론, 막부는 치하야성으로 향해서 대군을 보냅니다. 이 때, 치하야성을 둘러싸고 있던 무장 중 1명이 닛타 요시사다(新田義貞)였습니다.
그는, 하치만타로 요시이에(八幡太郎義家)의 17대 손으로 키요카즈겐지의 대종가에 해당하는 명문의 출신이었지만, 권세를 자랑하는 호조의 가마쿠라 막부 아래, 그 요청을 거부하지 못하고 치하야성 공격에 출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 그는 치하야성을 공격하지 않고 꾀병을 핑계로 영지인 우에노로 돌아와 버려, 이윽고 반기를 들게 됩니다. 또 한사람 겐지의 온다이(御大) 1인 아시카가 타카우지였습니다. 그는, 그 하치만타로 요시이에의 3남 요시쿠니(義国)의 차남 요시야스(義康)의 8대손 이었습니다. 그는 호조와도 인척관계에 있긴 했지만, 그보다 앞서는 것은 겐지의 동량의 핏줄로서의 자긍심이었습니다.
고다이고덴노 초상화
타카우지와19명의 무장은 쇼군의 명으로 소집되어, 반은 교토의 수비를 나머지 반은 주력으로 센죠우산(船上山)을 공략하게 되었습니다. 이 당시의 타카우지는 부친상을 당한지 불과 3개월에다 병에 걸린 상태입니다. 그런데 계속해서 출진을 재촉당하자 분노해 고다이고덴노의 편에 서기로 하고 상경합니다. 아들인 센쥬왕(千寿王)과 아내를 가마쿠라에 인질로 잡힌 뒤에, 3월 27일 남동생인 타다요시(直義)를 시작으로 키라(吉良), 우에스기(上杉), 닛키(仁木), 호소카와(細川), 이마가와(今川), 아라카와(荒川)등 일족 3,000여명을 인솔해 가마쿠라를 출발합니다.
막부의 총사령관이 된 타카우지가 입경한 것이 겐코 3년(1333년) 4월 16일입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센조우산에 막부를 토벌하려는 자신의 의사를 밀서로 전달해 고다이고덴노에게서 칙명을 받아 냈습니다. 이를 모르는 막부군은 교토 남부의 야와타와 야마자키에서 막부 토벌군과 교전중이었습니다.
- 집단이나 파벌의 수령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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