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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로쿠하라탄다이 멸망, 432명 할복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로쿠하라탄다이 멸망, 432명 할복



겐코 3년(1333년) 5월 9일, 로쿠하라탄다이의 북방을 맞는 호조 나카토키가, 일행 432명과 함께 할복했습니다. 


 제14대로 집권한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가 사실상의 실권을 잡은 가마쿠라 막부에 대해, 구스노키 마사시게(楠木正成)와 함께 막부 토벌의 봉화를 든 제 96대 고다이고덴노(後醍醐天皇)에게 막부군은 아시카가 타카우지(足利高氏)를 불러 견제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는 이미 덴노측에 서기로 마음을 정한 뒤였습니다. 교토로 들어가 사면에서 공격을 시작하는 군세에, 로쿠하라 탄다이는 별 저항도 하지 못하고 패퇴합니다. 결국 로쿠하라 탄다이의 북방을 맡던 나카토키는 관동을 향하기로 합니다.(타카우지 입경)



호조 나카토키



 로쿠하라를 뒤로 한 나카토키 일행은 머지 않아, 선진을 맡고 있던 로쿠하라탄다이 남방을 맡는 도키마스(時益)는 적이 쏜 화살에 맞아 전사합니다. 동행하고 있던 코우곤덴노(光厳天皇)도 유시에 맞아, 왼발을 부상당합니다.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도망친 나카토키는 이미 700기까지 줄어 들고 있던 자군을 삼면으로 나누어 선봉을 가신 카스야 무네아키(糟谷宗秋)에, 후진을 맡아 도중에 합류한 사사키 토키노부(佐々木時信)는 분전을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든 도착한 반바(番馬)의 숙소에 도착할 즈음, 근방의 고개는 적에 의해서 봉쇄되고 있었습니다. 


 나카토키 등이 관동에 향한다는 소문이 흐른 5월 6일에, 고다이고 천황의 고노미야(五宮)[각주:1]이 발한 영지에 응한 아쿠도우(悪党)[각주:2]나 노부시(野伏)[각주:3]들이 이미 반바에 도착하고 있었습니다. 그 수는 대략 5,000명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분전을 통해 우세를 점했지만, 후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가까운 츠지도우(辻堂)[각주:4]에 몸을 숨겨 후방에서의 원군 도착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본 것은 후방에서, 관의 어기(御旗)를 내건 5,000남짓의 집단이었습니다. 후진은 이미 로쿠하라탄다이 전멸의 오보를 듣고 타카우지에게 항복한 뒤였습니다.



432명의 할복



게다가, 이 장소를 탈출하려 해도, 이 앞은 미노의 토키(土岐) 일족이나 미카와의 키라(吉良) 일족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는 담담히 주위에 말합니다.


"이미 호조도 끝났구나. 지금까지 함께한 여러분에게 감사하네.  어떻게든 여러분에게 보답하고 싶지만, 이미 우리의 운명은 다한듯 하네. 너희들에게 이 나카토키의 목을 바치겠네. 이 목을 가지고 적에게 항복하면 은상을 받아 죄도 용서받을 수 있을 것이네."


 이 말을 남기고 칼로 할복한 그를 보고, 그 자리에 있던 432명이 그를 쫓아 할복했습니다. 츠치도우의 들은 피바다가 되어 시체릐 산이 쌓였습니다. 그곳에 남은 고곤덴노는 노부지들에게 포위당합니다. 그는 일본의 삼신기를 고노미야에게 전달합니다. 여기서 로쿠하라탄다이는 멸망하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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