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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타카우지, 로쿠하라탄다이를 공격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타카우지, 로쿠하라탄다이를 공격



겐코 3년(1333년) 5월 7일, 시노무라에 포진하고있던 아시카가 타카우지가 교토를 목표로 해 출발 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가 가마쿠라에서 연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도, 합의제 아래 요리토모 계열의 쇼군은 불과 3대로 끊어져, 그 다음은 이름뿐인 쇼군을 공가들이 임명해, 실질적으로는 요리토모의 아내 호조 마사코(北条政子)의 친가인 호조 가문이 집권해 실권을 잡게 되었습니다. 이윽고 쇼와(正和) 5년(1316년), 제14대 쇼군으로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가 취임합니다. 그런데, 그 2년 뒤에 제96대 덴노로 즉위 한 고다이고덴노는 현 정권에 불만을 가져, 덴노의 친정을 목표로 해 은밀하게 획책합니다. 이에 막부와 덴노의 싸움이 벌어지니, 그 가운데서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은밀히 덴노측에 설 것을 결의합니다.(타카우지 입경)



호조 나카토키 초상화



 이 때, 막부가 교토 수호를 위해서 로쿠하라의 북쪽과 남쪽으로 설치한 기관인 로쿠하라탄다이(六波羅探題)의 북방을 맡고 있던 것은 제13대 호죠 모토토키(北条基時)의 아들 호조 나카토키(北条仲時)였고, 남방을 맡고 있던 것이 한 집안의 호조 도키마스(北条時益)였습니다. 대군을 인솔하고 경에 들어간 타카우지의 참전에, 일단 로쿠하라탄다이는 사기가 올랐습니다. 하지만 정작 타카우지가 전장에 나가지 않고 시노무라에 진을 치고 연회만 열자 사기는 바로 내려갑니다. 게다가 야마자키에서 분전하던 막부군 총사령관 나고에 타카이에(名越高家)가 전사해 버려 막부측의 사기는 내려가기만 했습니다. 한편, 타카우지에게는 근린 지역에서 계속해서 응원군이 와 사기는 올라가기만 했습니다. 


 겐코 3년(1333년) 5월 7일, 타카우지는 교토를 목표로 해 시노무라를 출진 합니다. 시노무라의 하치만신궁에 기원서를 납입하고 전승을 맹세한 타카우지가 오에산(大江山)을 넘은 무렵에, 한 무리의 산비둘기가 미나모토의 백기 위를 춤춥니다. 이것을 하치만대보살의 가호라 생각한 타카우지는 더욱 세력이 더 높아졌습니다. 교토에 도착할 무렵 그의 군세는 무려 5만에 이르렀습니다. 여기에, 아카마츠 노리무라(赤松則村)나 치구사 타다아키(千種忠顕)의 군세도 더해져, 사방에서 교토로 쳐들어갑니다. 한편 로쿠하라군은 수세를 알고 삼면으로 나뉘어 각지에서 응전합니다. 수세에다 낮은 사기로 결국 남은 군세는 1,000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결국 로쿠하라 요새에서 농성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내일의 작전을 짜는 로쿠하라에서는, 나카토키의 가신 카스야 무네아키(糟谷宗秋)가 의견을 제시합니다.


 '불과 1천기로는 적과 맞겨룰 수 없습니다. 하지만 놈에게 토벌되는 것도 분합니다. 여기서는 일단, 고곤덴노(光厳天皇)와 덴노를 데리고, 일단 관동으로 물러나 때를 봐서 재기를 도모하기로 합시다. 일단 세타로 가서, 사사키 도키노부(佐々木時信)과 합류해 앞으로의 전망을 살핍시다.'


 이 의견을 받아들여 호조 나카토키와 도키마스는 관동으로 돌아갈 결의를 합니다. 호조 나카토키는 그때 아내에게 가서 말을 합니다.



로쿠하라 요새를 뒤로 하는 나카토키



 '끝까지 함께 하자고 했지만, 이미 적군은 동서의 길을 막았소. 불과 1천기로 그것을 돌파하고 관동까지 무사히 달아날 수가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오. 그대는 아들을 데리고 도망쳐 주시오, 당신은 여자이고 아직 우리의 아들은 아직 어리오. 비록 적에게 발견되어도, 그들은 놓쳐 줄 것이오.'


 '아니오. 저는 여기에 남겠습니다. 당신을 따라 관동으로 향하는 것은 방해만 될 뿐이고, 그렇다고 해서 적을 피해 도망치는 것은 무가의 수치입니다. 여기 로쿠하라에서 무사의 긍지를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부인의 단단한 결의에 눈물을 훔치며 요새를 나와 오미로 향하던 나카토키가 문득 뒤를 돌아보면 이미 로쿠하라 요새는 불길에 휩싸인 채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