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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남북조 시대/역사편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모리요시 친왕과 구노스키 마사시게 재기

일본 무로마치시대 역사편;

모리요시 친왕과 구노스키 마사시게 재기



 겐코 3년(1333년) 윤 2월 1일, 요시노산에 칩거하고 있던 모리요시 친왕(護良親王)이 가마쿠라 막부의 공격을 받아, 코야마(高野山)로 탈출했습니다.



모리요시친왕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연 뒤로 한참 동안이나 무사들의 시대가 개시되었습니다.(요리토모 쇼군 취임) 이에 덴노의 권력은 거의 사라진 것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덴노의 친정을 꿈꾸고, 몇번이나 수면 아래에서 계획을 세운 제 96대 고다이고덴노(後醍醐天皇)였지만, 당대는 제14대 싯켄 호조 다카토키(北条高時)가 실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덴노가 막부에 비해 부족한 것은 다름아닌 군사력입니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구노스키 마사시게(楠木正成)였습니다. 이들은 가사기산(笠置山)에서 봉기해 막부를 공격하려 하니, 이것이 겐코 원년에 일어난 '겐코의 변'입니다. 하지만 막부의 막강한 군사력에 하루만에 패퇴한 덴노는 도망치다 잡혀버리고 맙니다.



시모아사카성 전투



 한편 마사나리는 시모아카사카성(下赤坂城)에서 농성하며, 막부군 상대로 자신있는 게릴라전을 행하며 분투합니다만, 성의 부실함과 상대의 강성함을 보고 10월 21일 성에 불을 지르고 콘고산(金剛山)으로 도망쳤습니다. 반란의 주도자인 고다이고덴노는 오키에 유폐되고, 측근들은 처형되어 덴노의 복권은 아침이슬처럼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가사기산에서 탈출하고 나라, 와카야마를 지배하고 있던 고다이고덴노의 아들 모리요시친왕이 각지의 반 막부 세력을 결집시키는 일에 성공했습니다. 그는 11월에 재차 막부 토벌의 봉화를 들고 요시노산(吉野山)에서 농성을 시작했습니다.


 모리요시 친왕은 각지의 무사에 영지를 발해, '막부 토벌'을 호소합니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것이 아카사카성 공방전에서 죽었다고 여겨지던 마사나리입니다. 마사나리는 막부 측에 빼앗기고 있던 시모아카사카성을 탈환해 그 기세인 채로, 이즈미를 통해 셋츠에 진공을 시작합니다. 새해가 밝은 겐코 3년(1333년)의 1월에는 텐노지 전투로 로쿠하라탄단(六波羅探題)에 승리합니다. 이렇게 되어서는, 막부도 가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가마쿠라에서 20만의 대군을 기나이에 향해 진군시키는 것과 동시에, 마사나리의 목에 막대한 은상을 걸어 장병의 사기를 올린 뒤 재결전을 하게 됩니다.



구노스키 마사시게



 이 소식을 들은 마사나리는, 북방의 최전선인 카미아카사카성을 동생 마사스에(正季)에게 300의 군사와 함께 지키게 해 스스로는, 남동쪽에 쌓아 올린 치하야성(千早城)에서 막부의 대군과 싸울 준비를 합니다. 이윽고, 모리요시 친왕이 있는 요시노 방면과 마사나리가 지키는 카와치 방면, 반 막부파가 점거하는 키이 방면의 세 방면으로 나누어져 막부군은 진공합니다. 그 중의 카와치 방면의 선봉은 아소 하루토키(阿蘇治時)였습니다. 그가 인솔하는 8만의 군세가 시모아카사카성에 진군한 것은 2월 22일의 일이었습니다. 3면으로 산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충지인 카미아카사카성에다 평소부터 마사시게에 단련된 게릴라전에서 적을 맞아싸웠습니다. 8만의 대군 상대로 잘 싸우긴 했으나 2월 27일, 물의 보급을 끊은 일로 인해, 마침내 함락되어 버립니다. 


 마사시게는 빠듯이 탈출에 성공해, 콘고산으로 패주 했습니다. 한편, 모리요시 친왕이 있는 요시노를 공격한 것은, 오사라키 이에토키(大仏家時)가 인솔하는 요시노 방면 군세였습니다. 이쪽도 시모아카사카성과 같이 대군 상대로 분전 했다었습니다만, 수의 차이는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모리요시친왕의 병력은 1,000명인데다 그 중의 대부분도 승병이었습니다. 가마쿠라 무사들과는 비교되지도 않았습니다. 함락도 시간 문제가 된 겐코 3년(1333년) 윤 2월 1일 각오한 측근 무라카미 요시테루(村上義光)는 모리요시 친왕의 갑옷과 히레타레(直垂)를 입고 대역으로  할복 자살해, 적의 눈을 집중시킨 뒤에 모리요시 친왕은 탈출하게 됩니다. 친왕을 찾지 못한 군세는 마사시게가 있는 치하야성으로 진로를 틀어 진군합니다. 그리고 키이방면 담당이었던 나고시 무네노리(名越宗京)가 인솔하는 군세도 합류해 치하야성 총 공격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