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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타이라노 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타이라노 키요모리 태정관에 오르다



 닌안 2년(1167년) 2월 11일, 타이라노 키요모리(平清盛)가 사다이진(左大臣), 우다이진(右大臣)을 역임하고, 벼락출세 해 태정관(太政大臣)에 올랐습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는 헤이안 시대 마지막에 귀족이 아니고, 무사 최초로 정권을 잡아, 헤이케 전성 시대의  기반을 쌓은 사람입니다. 그는 타이라노 타다모리(平忠盛)의 적남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 출세는 어떻게 생각해도 이례중의 이례로, 「헤이케 이야기(平家物語)」나 「미나모토 타이라 성쇠기(源平盛衰記)」에서는 재밌게도 키요모리 사생아설이 나와 있습니다. 키요모리는 12세에 종오위에 제수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아버지인 타다모리는 종사위로, 아무리 아버지의 위광이 있었다고 해도 있을 수 없는 출세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시라카와덴노의 사생아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타이라노 키요모리 초상화



 72대 시라카와덴노는 자신의 아들인 토바덴노의 신부에게 손을 대, 아이가 생기자 그를 스토쿠덴노로 즉위시킵니다. 이로 인해 발생한 것이 바로 '호겐의 난'입니다.(호겐의 난) 이 시점에서 시라카와덴노는 죽은 뒤였습니다. 그런데도 그의 영향력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한 말 중에 유명한 것이 '생각했던대로 되지 않는 것은 카모가와의 물, 주사위의 눈과 히에이잔의 승병이다.'이 잇습니다. 즉, 이 세가지를 제외하고는 그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습니다. 야사이지만, 키요모리의 출세를 시기하는 사람이 있자, 토바덴노가 '키요모리는 천한 사람이 아니다.'라 말하기도 햇습니다.


「미나모토 타이라 성쇠기」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습니다.


 기온(祇園)의 서대문(야사카신사의 누문) 근처에 사는 여성이, 어느 날 물을 길어오려고 머리에 통을 실고 공동 우물로 향해다. 그녀는 '기모노의 옷자락이 젖어선 안 된다.'고, 옷자락을로부터 걷고 있었다. 야사카신사(八坂神社)에 참배하러 온 시라카와덴노 일행이 그의 앞을 지나갔다. 지나가던 시라카와 덴노는 드러난 그녀의 허벅지에 한 눈에 반했다. 시라카와덴노는 그녀를 마음에 들어해 자주 불렀다고 한다.


 당시 궁중의 여성은 남성의 앞에서 12단의 옷을 입어야 해서, 하나라도 벗을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남녀사이의 운우지정을 나눌 때는 완전한 어둠속에서 했기 때문에, 얼굴조차 볼 수 없기에 이렇게 허벅지를 노출하는 것은 당시에 상당한 자극이었습니다. 이 여성이 바로 기온뇨고(祇園女御)입니다. 바로 키요모리의 어머니이지요. 이 '뇨고(女御)'는 '후궁'이라는 의미입니다. 당시는 예의에 엄격한 시대입니다. 마음대로 '후궁'이라 자칭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게다가 덴노는 그녀를 위해 궁까지 만들어줬다고 하니 상당한 총애를 받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얼마나 총애받았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습니다.



기온노교와 키요모리



 시라카와덴노는 독실한 불교 신자로 엔큐(永久) 2년(1114년) '살생 금지령'을 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 직후 가토 타유우 나리이에(加藤大夫成家)라는 이가 겸비위사정(検非違使丁)[각주:1]에게 '매를 사용해 새를 잡았다.'는 죄목으로 잡힙니다. 그런데 그는 오히려 즐거운 얼굴로 '다행이다.'라 연신 말했습니다. 그에게 이유를 묻자, '제 주인은 저에게 매일 새를 잡아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냥이란 것이 매일 성공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몇 번 실수를 한다면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차라리 이렇게 잡히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이 남자의 주인은 다름아닌 기온노뇨고입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알게 된 시라카와덴노는 '기온뇨고'를 위해서라면...'이라며 용서했다고 합니다.


또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어느 비가 내리는 밤, 시라카와덴노는 기온노뇨고의 집에 가려고 케이고(警固)역의 무사들을 데려 갔는데, 저택의 근처에서 왠지 기분 나쁜 사람을 만납니다. 머리 부분이 묘하게 빛나고, 높게 올린 양손에는 나무망치와 날카로운 광침(光針)과 같은 물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에 덴노 일행은 매우 당황했습니다. 이때 20세의 혈기왕성한 젊은이 타다모리는 '제가 퇴치하겠습니다!'라며 나섭니다. 가까이 가보니, 그는 요고가 아니라 한 명의 노승이었습니다. 현재의 아시카 신사의 경내에는 이때 등명을 키려고 한 등롱이 남아있어 '타다모리 등롱'이라 불린다고 합니다. 이에 그의 용기에 감복한 시라카와덴노는 포상으로 기온노뇨고를 그에게 내립니다. 


 하지만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고, 배 안에 있는 아이가 키요모리라는 것입니다. 이때 덴노는 그에게 '태어난 아이가 여자 아이라면 궁궐로 보내고, 사내 아이면 무사로 길러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이윽고 3세가 된 키요모리는 덴노의 수행을 해서 쿠마노모우데(熊野詣)로 향하게 됩니다. 이곳에서 키요모리는 세살인데도 불구하고 참마가 많은 것을 보고 싯구를 읊었습니다. 그리고 그 싯구를 들은 시라카와덴노역시 답합니다.


が子は 這うほどにこそ なりにけれ

참마의 새싹이(자라서 이파리가) 뻗어나갈 정도가 되었습니다.

ただ盛りとりて 養いにせよ

단지 한창때에 거름이던지


 이 싯구의 교환이후로 시라카와덴노가 키요모리를 아들로 인정햇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대로 라면, 기온노뇨고가 30대에 출산한 것이 되어 상당한 고령 출산입니다. 사실 그녀에게 여동생이 있었다고 하여, 아마 그녀가 어머니가 아닐까합니다.  현재, 교토 교엔에 있는 이쓰쿠시마 신사는 키요모리가 어머니 기온노뇨고를 위해, 아키의 이쓰쿠시마 신사를 분사해 건립했다고 합니다.

  1. 당시의 경찰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