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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겐페이 쟁란/역사편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요시모토 욕탕에서 암살당하다

일본 헤이안시대 역사편;

미나모토노 요시모토 욕탕에서 암살당하다



 헤이지2년(1160년) 1월 4일, 앞의 헤이지의 란에서 패배했던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오와리국 노마에서 모살되었습니다. 



미나모토노 요시토모 그림



카와치 겐지(河内源)의 동량인 미나모토노 타메요시(源為義)의 장남인 요시토모(義朝)는 아버지가 교토에서 조정의 용병으로서 활약하는 가운데, 대대로 계승한 영지인 사가미국 가마쿠라에서 자랍니다. 여기를 거점으로 겐지 대대로 이어온 유서 깊은 호족들을 따르게 해 그가 20대가 되자, 칸토 남부 일대에, 큰 세력을 가지기까지 됩니다. 그가 기나이에서 멀어진 것은, 아버지 타메요시와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않아, 의절되었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도 있습니다만, 본거지를 떠나고 교토에 있는 일이 많은 아버지 대신 현지 관동을 지배하고 있엇던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후, 니히라(仁平) 원년(1153년)에 요시토모가 교토에서 시모쓰게노카미(下野守)에 제수받고아버지의 은거와 함께 겐지 동량을 상속 하고 나서는, 요시토모의 장남 미나모토노 요시히라(源義平)가 불과 15세로 관동 현지의 일을 맡고 있기도 했엇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요시토모가 교토에 오른지 얼마되지 않은 호겐 원년(1156년)에 발발한 것이, 호겐의 난(호겐의 난)이었습니다. 덴노 가문의 주도권 분쟁에 섭관 가문의 기대가 겹쳐, 거기다가 그들을 제지해야 할 미나모토(源)와 타이라(平)마저 싸움에 말려들었습니다. 아무튼 이 난으로 인해 요시토모는 아버지 타메요시와 남동생 타메토모(為朝)를 적으로 돌리게 됩니다. 이때 키요모리(清盛)나 미나모토노 요리마사(源頼政)와 함께 고시라카와덴노 측에 붙은 요시토모는 야습을 진언해, 시라카와 북궁 급습에 성공하는 다대한 공헌을 세웠습니다.  그는 사마노카미(左馬頭)에 제수되었고, 아버지를 죽이고 남동생을 유배보냈습니다. 이 사마노카미는 조정에서 군사, 의식을 다루는 중요한 관직입니다.


 그런데 이 사마노카미에 만족하지 않아는지, 실세를 잡은 신제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아니면 키요모리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그는 후지와라노 노부요리(藤原信頼)와 결탁해 키요모리의 부재중에 헤이지의 란(헤이지의 란)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이 란을 실패로 끝납니다. 그러나 자신의 본거지는 언제까지나 동국, 그곳에는 많은 병력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본거지로 도망치려 합니다. 하지만 도중 히에이잔 렌라쿠지 승병의 무사 사냥을 당하고, 눈보라가 몰아치며 자신을 따르던 이들이 하나하나 죽어갑니다. 그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제일의 가신 가마타 마사이에(鎌田政家)와 그의 장인 오사다 타다시치(長田忠致) 부자를 의지해 오와리국으로 도망치는데 성공합니다.



그는 욕실에서 암살당하고 맙니다



 하지만 이미 그들은 요시토모의 목에 걸린 은상에 눈이 멀어 있었습니다. 눈보라로 지친 몸과 마음을 녹이라며 그들이 권유한 욕탕에서 구운돌에 물을 뿌리고 몸을 녹이고 있는 그에게, 타다시치의 부하들이 나타나 베어버립니다. 헤이지 2년(1160년) 1월 4일, 그는 입욕중에 암살당해 죽었습니다. 그는 죽기전에, '나에게 목검 하나라도 있었다면...'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로 인해 그의 무덤이 있는 오미도우지(大御堂寺)에는 엄청난 수의 목검이 올려져 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가계도 일소한 키요모리는 신제이도 죽었기 때문에 최고 권력자로 발돋움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