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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가문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백제의 후예, 오오우치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백제의 후예, 오오우치 가문



 우리와 일본의 밀접한 관계를 이야기 할 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백제'입니다. 실제로 일본의 덴노가 '백제의 후손'임을 밝혔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요, 오오우치 가문은 백제 임성태자의 혈통을 지니고 있습니다.

오오우치 하나바시大内花菱

오오우치 가문의 성립


 백제 왕(聖王)[각주:1]의 아들인 임성태자(琳聖太子)는 아버지의 명령을 듣고 일본에 문화와 불법을 전하러 가, 그곳에서 살게 됩니다. 이 자손들이 오오우치 마을에 살며, 자신들을 '오오우치'라 자칭하게 된 것이 오오우치 가문의 출자입니다. 오오우치 가문은 점차 번성해 헤이안 시대에도 그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원래 고케닌(御家人)은 아니었지만[각주:2] 점차 위세를 넓혀 고케닌 중 하나로 인정받기까지 합니다. 남북조의 동란에 오오우치 가문 역시 둘로 나뉘어 져서 참전해 우여곡절을 거쳐, 스오, 나가토, 이와미, 부젠, 이즈미, 키이의 수호직을 맞는 엄청난 대 가문이 됩니다. 


 11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가 교토에서 쫓겨나 야마구치로 왔을 때, 오오우치 요시오키(義興)는 그를 극진히 대접합니다. 이로 인해 후에 요시타네가 복직했을 때, 관령대(管領代)를 맡는 등 승승장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교토에 머무른 덕에, 영지가 아마고 츠네히사(尼子経久)에게 위협받아 버립니다. 이에 요시오키는 영지로 돌아와 아마고 가문을 막아내다가 병사하게 됩니다.



오오우치 가문의 전성기를 열다



오오우치 요시타카



 그의 뒤를 이은 것은 적남 요시타카(義隆)입니다. 스오, 나가토, 이와미, 부젠, 치쿠젠, 빈고, 아키의 일곱개 국가를 다스리는 센고쿠 다이묘가 된 것도 그의 대의 일입니다. 그는 오오토모 가문과 화목을 맺은 뒤, 쇼군 요시하루의 요청으로 상경을 준비하나, 아마고 가문의 아키 침략으로 단념해야 했습니다. 대신 모리 모토나리등과 결합해 츄고쿠에서 세력기반을 세우는데 총력을 다했습니다. 텐분 9년(1540년) 아마고 하루히사가 모리의 본거지 코오리야마성을 공격하자, 요시타카는 보복으로 아마고의 갓산토다성을 공격하였으나 대패하고 이후에 그는 출격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오우치 가문의 몰락


 무장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않는 요시타카는 여러가지 문화적 기예에 빠져 버립니다. 군사일은 수호대에게 일임하고 자신은 츠키야마 관(築山館)에서 학문이나 예능에 몰두했습니다. 게다가 자비엘에게 남만신교(기독교) 포교를 허용하여 그에 대한 반감은 커져만 갔습니다. 게다가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스에 타카후사(陶隆房)와 요시타카의 측근의 사가라 타케토(相良武任)의 갈등이 표면화 되며, 결국 스에 타카후사가 반란을 일으켜 요시타카를 살해해 버립니다. 그리고 요시타카의 조카 오오토모 하루히데(大友晴英)를 불러 요시나가(義長)로 개명해 잇게 합니다. 코우지 원년 (1555년) 전국 삼대 기습전 중 하나인 이쓰쿠시마 전투(이쓰쿠시마 전투)에서 대패하면서 오오우치 가문은 멸망하게 됩니다.(오오우치 요시나가 할복)

  1. 무령왕의 아들로, 훌륭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일본에 불교와 문화를 전파했습니다. [본문으로]
  2. 가마쿠라 시대 쇼군과 주종 관계를 가진 무사를 뜻합니다. 실제로는 실세인 가문들을 의미합니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