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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가문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정토진종의 전파자, 혼간지 가문

일본 전국시대 가문편;

정토진종의 전파자, 혼간지 가문



 일본 전국시대에 독특한 것 중 하나가 농민들의 봉기로 일어나서 만들어진 종교 국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농민 봉기는 주로 '잇코슈(일향종)'이라는 종교를 믿는 농민들이 일으켜 '잇코 잇키'라고 부릅니다. 일각에서는 이런 잇키 세력을 '직접 민주주의가 실시된 자치국'이라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만, 실제로는 혼간지 가문[각주:1]이 이끌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들은 잇코슈의 일종인 정토진종을 믿었습니다.

쿠죠사가리후지九条下り藤

정토진종의 창시


 잇코슈를 전파하는 절을 혼간지라고 합니다. 오오타니 묘당(大谷廟堂)을 맡는유수직(留守職)을 제수받은 카쿠뇨(覚如)가 이 묘당을 사원화해서 혼간지가 탄생합니다. 그리고 카쿠뇨의 자손들이 대대로 이 오오타니 혼간지를 맡아 정토진종 전파에 힘을 씁니다. 잇코슈는 절대자의 구제와, 만민 평등을 설파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으로 인해 이들은 토호쿠에서 쫓겨나 카가, 노토, 에치젠, 오미 등에서 교단을 형성해 갑니다.



혼간지의 중흥, 렌뇨의 등장



혼간지 렌뇨 초상화



 이런 혼간지를 중흥시킨 것은 바로 혼간지 렌뇨(蓮如)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미천한 몸종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많은 노력을 통해 정토진종의 가르침을 정리합니다. 이로 인해 배다른 형제와 그 사이에 후계자 갈등이 붉어지게 됩니다. 결국 숙부의 개입으로 강력한 우군이 생긴 렌뇨가 혼간지 3대 교주가 됩니다. 그는 평생 5명의 부인을 맞이해, 27명의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는 이 아들들을 각지의 중요거점에 파견했고, 딸은 유력한 사원에 시집보내, 일거에 전국적인 정토진종의 세력확대를 꾀했습니다. 렌뇨는 교의를 쉽게 풀어내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농민들에게 정토진종을 퍼뜨리기 시작했습니다. 칸쇼 6년(1465년) 그들의 교세확장을 보다못한 히에이란 렌라쿠지의 공격으로 렌뇨는 각지를 전전하게 됩니다.


 분메이3년(1471년) 에치젠의 아사쿠라에게 요시자키(吉崎)체제를 허락받은 렌뇨는 뛰어난 능력으로 정토진종을 각지에 퍼트리기 시작합니다. 또 렌뇨는 정토진종의 가르침을 곡해하는 이들을 배척하는 활동도 정력적으로 해 냈습니다. 또한 오부미(お文 )라 불리는 가르침을 쉽게 히라가나 위주로 정리한 문서를 각지에 보급해 직접 설법을 하지 않고서도 문도들을 늘려갔습니다. 이런 렌뇨의 가르침을 들은 백성들은 결집해,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잇키를 일으키게 됩니다. 가장 대표적이며, 최초의 잇키는 카가에서 일어난 카가 잇코우 잇키 입니다.(카가 잇코우 잇키) 이 카가 잇코우 잇키는 장장 100여년간에 걸쳐 일어난 대규모 잇키로, 이미 하나의 국가라 봐도 손실이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정작 렌뇨는 무장봉기에 부정적이었습니다. 요시자키에서 쫓겨난 렌뇨는 오사카에 들어가 고보를 짓는데, 이것이 바로 이시야마 혼간지입니다. 



혼간지의 발전


 16세기에 들어오자, 전국동의 와중에 잇코잇키는 각지에서 맹위를 칩니다. 혼간지 교단은 영세 농민에, 지역 사무라이, 토호 등의 무사의 계층에 이르기러, 강한 조직력을 니게 됩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여러 종교가 혼간지를 교토에서 탄압하는 텐분호케의 란(텐분호케의 란)이 일어나자 혼간지는 렌뇨가 지었던 오사카 고보를 거점으로 삼고, 이곳을 이시야마 혼간지라 부릅니다. 이시야마 혼간지가 위치한 오사카는 세 강이 맞닿아 흐르는 교통, 물류의 중심지로 여기에 자리잡은 혼간지는 다이묘, 막부, 조정에 밀착해 세력기반을 키워갑니다. 하지만 지역에 흘러들어간 혼간지는 각자의 이익관계에 다라 제각기 다른 가르침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


 

노부나가와의 대결



혼간지 켄뇨 초상화



 제11대인 켄뇨(顕如)는 거의 센고쿠 다이묘급의 세력을 이끌게 됩니다. 당시에 아시카가 요시아키를 이끌고 상경을 완수한 노부나가는 종교가 권력에 참여하는 것을 막기 위해 종교 탄압을 시작합니다. 히에이잔 렌라쿠지에 불을 지르는 등(히에이잔 렌라쿠지 토벌)의 악행을 보이자[각주:2] 켄뇨는 아시카가 요시아키의 노부나가 포위망에 동참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일어난 '이시야마 전투'는 장장 10년에 걸쳐 계속됩니다. 나가시마 잇코잇키에서는 오다 노부나가가 목숨을 잃을 뻔한 정도였습니다. 결국 에치젠, 나가시마 등의 지역의 잇키는 노부나가에게 정리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오사카는 천혜의 요충지, 아무리 노부나가라도 쉽게 공격할 수 없고 그냥 포위해 버립니다. 그렇지만 켄뇨는 계속해서 스즈키 마고이치가 이끄는 사이카 중, 모리 모토나리의 수군등의 지원을 받아 계속해서 버팁니다. 하지만 결국 오오기마치덴노의 칙명으로 켄뇨는 굴복하고 차남인 쥰노를 후계로 세웁니다. 이들이 퇴거한 이시야마 혼간지는 불태워졌고, 거기에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건설했습니다. 여기서 전국 다이묘 혼간지 가문은 멸망한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그 후의 혼간지는?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후계자 경쟁에서 밀린 쥰노의 형 쿄뇨(教如)에게 쥰노의 교단을 빼앗아서  히가시혼간지(東本願寺)를 만들게 합니다. 이에 쥰노는 자신을 이끄는 이들을 데리고 니시혼간지(西本願寺)를 만들게 됩니다. 혼간지의 무서움을 직접 눈으로 본 이야에스는 자신의 에도 막부를 위해 혼간지를 둘로 나눠버린 것입니다. 이 양 혼간지는 현재까지 그대로 남아 정토진종을 설법하고 있습니다.

  1. 정확히 말하자면 법명만 있고 성은 없어 '가문'은 아닙니다만, 편의상 이렇게 적었습니다. [본문으로]
  2. 어디까지나 불교 종파 입장에서 악행입니다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