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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농민들의 국가? 카가의 잇코우잇키

일본 전국시대;

농민들의 국가? 카가의 잇코우잇키



 쵸우쿄우(長享) 2년(1488년) 카가에 잇코우 잇키가 일어나 수호인 토카시 마사치카를 할복하게 하였습니다.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가 전 쇼군 요시나리(義教)를 암살한 요시키치의 란을 계기로 카가의 수호대가 된 토가시가가 노리이에(教家)파와 야스타나(泰高)파로 갈려 수호직을 두고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아카마츠 마사노리(赤松政則)도 참여해 이 싸움은 복잡해져만 갔습니다. 오닌의 란이 발발하고, 토가시 마사치카와 아카마츠 마사노리는 동군이, 토가시 코우치요는 서군이 되었었지요. 기억나시나요?


 카가의 농민들은 후계자 분쟁에서 군비가 징수되고, 전답은 전투로 파괴되며, 남성들이 징집되었습니다. 그 불만을 그들은 속으로 삭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땅에 정토진종의 분파, 혼간지의 씨앗이 렌노에 의해 뿌려지고 있었습니다. 렌노는 부락마다 도장을 세우고, 신사를 모아 공동체를 만들었습니다. 이곳에서 농민들은 단결하여, 조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단결에 경계심을 가진 코우치요는 혼간지를 탄압했고, 그로인해 그의 형인 마사노리에게 붙은 혼간지는 분메이 잇키(文明一揆)(분메이 잇키 발발)를 일으킵니다. 하지만, 권력을 얻은 마사노리역시 혼간지의 결속력을 경계해 동맹을 파기하고, 탄압을 시작하지요. 



봉기 실패의 비



 이에 혼간지 문도들은 격렬히 저항하고, 렌노는 퇴거하게됩니다(혼간지 렌노의 요시자키 퇴거). 쵸우코우 1년 오미(近江)에서 로쿠가쿠시(六角氏)와 전쟁을 하던 쇼군이 마사노리에게 참전을 요구해, 마사노리는 카가를 비우게됩니다. 그러자 잇키는 더욱 활발해졌고, 이에 당황한 마사노리가 돌아와 탄압을 강화하자, 마사노리와 라이벌 관계인 토가시 야스타카(富樫泰高)를 대장으로 옹립하고 타카오성(高尾城)을 포위합니다. 


 쵸우코우 2년, 어느덧 20만이라는 대 군세가 된 혼간지는 나무아미타불의 기를 내걸고 타카오성을 공격하기 시작합니다. 타카오성을 지키던 마사노리의 군세는 불과 1만, 결국 마사노리는 할복하고 맙니다. 그리고 약 100년간, 이 땅에는 백성의 소유인 나라가 탄생하게 됩니다. 이 사건을 잇코우잇키 또는 쵸우코우잇키라 부릅니다. 수호직에는 토가시 야스타카가 옹립되나, 이름뿐인 수호직이 되어버립니다.  



잇코우 잇키 기념 축제



 어떻게 당시에 백생들에 나라가 세워질 수 있었을까요? 동시대의 다른 잇키는 10년이 채 되지않아 중앙에서 새로운 수호가 파견되었는데요. 여기에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인 관령 호소카와 미사모토의 이해관계가 끼어있습니다. 그는 쇼군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쿠테타를 일으킨 사람으로, 전국시대의 막을 연 사람 중 하나입니다. 그가 쫓아낸 쇼군은 교토에 재입성하기 위해 와신상담하고 있었고, 여기에 도움을 준 사람 중 하나가 토가시 야스타카였습니다. 


 즉, 그는 토가시를 수호로 인정하지 않기 위해, 잇키를 묵인한 것입니다. 이때의 혼간지의 세력역시 작은것이 아니어서, 이웃의 에츠젠마저 영토를 지키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이런 혼간지에 종언을 고한 것은 다름아닌 신장, 오다 노부나가이지요. 그는 오사카의 이시야마 혼간지(石山本願寺)를 점령하고, 당시 법주 켄뇨(顕如)에게 무력 봉기의 중지를 호소하게 해, 카가의 잇코우잇키는 100여년만에 마무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