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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카가에서 분메이 잇키 발발하다

일본 전국시대;

카가에서 분메이 잇키 발발하다



 분메이 6년(1474), 카가(加賀)에 분메이 잇키가 발발합니다. 잇키가 무엇인지 모르시는 분은 다음 포스팅을 참조해 주세요.(잇키란 무엇인가?)


 역시 오닌의 난(닌의 난)에서 이야기는 시작합니다. 카가의 수호인 토가시 마사치카(富樫政親)는 이 난에 동군으로 참여하나, 그의 동생 토가시 코우치요(富樫幸千代)는 서군으로 참가합니다. 그런데 난이 진행되는 와중에 동군의 하리마(播磨)지역 영주 아카마츠 마사노리(赤松政則)의 원조를 받은 마사치카는 카가의 북부를 차지하고 있던 코우치요 일파를 축출해 버립니다. 대신, 카가의 북부 일부를 아카마츠에게 양도하지요. 마사노리는 승리를 거두고 본거지로 귀환합니다. 이 때, 코우치요가 군세를 이끌고 자신의 본거지였던 북카가를 수중에 차지하게 됩니다.



당시 상황



 사실 카가 주변에 있는 노토(能登), 에츠젠(越前)의 수호 모두 서군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우치요가 우세한 것은 자명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문명 3년 아사쿠라 타카카게(朝倉孝景)가 동군으로 참여하게 됩니다. 이 때를 호기라고 파악한 마사치카는 교토의 전장을 버리고 카가로 돌아와 코우치요를 공격합니다. 타카카게의 참전으로 동군의 우세를 점친 그는, 이로 인해 주변의 영주들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입니다. 공교롭게도 에츠젠에는 타카카게의 군세와 서군의 카이 하치로(甲斐八郎)가 교전 중이었습니다. 명장인 타카카게가 승기를 잡자, 카이의 군세는 대량으로 카가로 도망쳤고, 코우치요에게 합류합니다. 그러자 전세는 역전되어 오히려 코우치요가 카가의 남쪽까지 점령하고, 마사치카는 패잔병을 이끌고 에츠젠으로 도망칩니다.



잇키 발발!



 이 와중에 히에이잔 엔랴쿠지(比叡山延暦寺)에서 공격을 받고 교토에서 도망친 혼간지 8대 렌노(蓮如)가 에츠젠의 요시자키에 방사를 건립합니다. 이 방사는 요시자키어방으로 불리며, 수많은 신자들의 성지가 됩니다. 에츠젠의 사무라이들은 신자들을 아군으로 돌리기 위해서 그들도 신자가 되기로 하였습니다. 사실 광신자만큼 무서운 전력도 없지요. 일부의 과격 신자들은 타 종교를 이단으로 간주해 근처의 신사에 테러를 가하는 행위도 종종 있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된 렌뇨는 타종교에 대한 비방을 해선 안된다고 하나, 이미 그 기세를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혼간지의 교조 렌노(蓮如)



 문명 6년 미노(美濃)의 사이토 묘우친(斉藤妙椿)이 중재해 아사쿠라 타카카게와 카이 하치로가 화해해 코우치요는 카이라는 강력한 아군을 잃게 됩니다. 이 호기를 놓칠 마사치카가 아니지요. 그는 혼간지 문도들에게 나를 지원해 준다면, 교단을 지지해 주겠다 라는 것을 천명합니다. 코우치요는 당시 혼간지와 적대하는 관계인 타카다문도들이 의탁하던 곳이 코우치요였기 때문에, 혼간지 역시 호응하고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렌노는 이때 '수호(코우치요)님이 잘못된 불법을 따르고, 농민들에게 벌을 내리니 부득이하게 군사를 일으킨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비방하지 말자더니, 어느새 말을 바꾸었네요.전투의 상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코우치요의 본성인 렌다이죠성(蓮台寺城)이 점령당했습니다. 하지만 혼간지 문도 중에서만도 2,000명이나 되는 사상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실 분메이 잇키는 잇키라고 보기보다는 전쟁이라고 보는게 옳겠지요. 이 뒤에는 렌노의 요시자키 퇴거, 쵸우쿄우(長享)잇키 등 더 많은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