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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종결과 그 영향

일본 전국시대;

오닌의 란의 종결과 그 영향




 오닌의 란은 무신뿐만 아니라 문신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문신은 명목상 장원을 가지고 있어 그 수입으로 먹고 살았는데, 전란에는 장원에서의 수입을 기대하기 힘들었고, 따라서 문신의 생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치죠 노리후사(一条教房)는 전 관백이였지만, 문신이었기에 오닌의 란이 발발한 이듬해 영지인 토사(土佐)로 떠납니다. 그의 저택은 타버렸고, 방대한 장원은 소실되었지요. 목숨만을 간신히 건져 나라로 피신했었습니다. 이런 그의 귀농(?)은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충격이었습니다. 관백까지 오른 사람이 지방으로 돌아가다니요. 조정에서도 반대한 귀족이 많았다고 합니다.


토사국의 위치


 당시 토사는 경제적으로 곤궁하지는 않으나, 지나치게 시골이였습니다. 그런데 전 관백인 노리후사가 토사로 오니, 지역 유지들은 두손을 들고 환영했습니다. 이 시골에, 노리후사는 관백의 경험을 십분활용하여 교토를 재현합니다. 길을 정비하고, 강을 치수하고 교토와 같은 신을 모시는 신사를 만들고, 항구의 정비를 통한 무역 확충과 농지의 정비까지 교토가 전란에 휩싸여 있을 때 그는 이 토지에서 마음껏 내정을 펼쳤지요.  이윽고 이 지역은 크게 발전하여 노리후사의 저택은 '나카무라 고쇼(中村御所)'라고 불릴 정도였습니다.(히나노고쇼가 쇼군의 저택이었던 기억하시죠?) 그리고 이치죠가는 다이묘로 성장해가지요. 지금도 이 지방에서는 이치죠 노리후사를 기리는 축제가 있다고 합니다. 


아직도 노리후사를 기리는 축제가 있다네요나카무라 고쇼(中村御所)의 터


 이렇게 오닌의 란으로 축출된 문신들은 노리후사처럼 지방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에는 전화도 신문도 없었기에 시골과 교토의 문화차이는 격렬한 것이었습니다. 이 문신들은 전국 방방곳곳으로 퍼져, 일본의 각지에 문화를 전파하게 됩니다. 마사히로역시 이때 이렇게 피란한 문신들을 적극적으로 맞이했었다고 합니다.오닌의 란은 서군의 주축이었던 오오우치 마사히로가 귀국하며 종결됩니다. 애초에 종결이라고도 말하기가 뭐한게 앞서 포스팅한 세 전투 이외에는 11년 동안 딱히 이렇다 할만한 전투가 없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공교롭게도 전쟁이 시작되고 7년차에 서군의 우두머리인 소젠이 죽고, 연달아 동군의 우두머리인 가쓰모토도 죽었습니다. 게다가 그 다음해에 소젠의 후계인 야마나 마사토요(山名政豊)와 호소카와 마사모토(細川政元)가 화해를 해 버립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무장은 이 때 귀국해, 사실상은 종전에 가까운 상태가 되지요.

 그런데도 오닌의 란의 종결은 오오우치 마사히로의 귀국일이나, 쇼군 주최의 천하태평의 주연이 열린 날로 간주되고 있습니다. 이는 란의 종결이 단순히 전쟁의 종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실 후계자 분쟁으로 일어난 오오닌의 란에 참여한 다수 지방 무장은 별로 얻어갈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들이 참여했는가 한다면 바로 돈과 명예 때문이지요. 마사히로는 대조선, 대명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쌓아 올렸지만, 아무리 지지부진 하더라도 11년간 전쟁에 참여했을  때의 비용은 쉽게 감당할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명예를 얻었는가 하면, 쇼군을 옹립하고 있던 동군에 비해 서군은 아무래도 역도의 입장이였으며, 오닌의 란 자체의 승패도 애매하기 때문에 오오우치의 입장은 곤란해 진 것입니다. 



일본사의 유명한 악녀, 히노 토미코



이를 해결한 것은 뜻밖에도 히노 토미코였습니다. 자신의 아들을 쇼군으로 삼으려면 어떠한 일도 마다하던 그녀는 전쟁 중에 무장들에게 연리 6할에 달하는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동군뿐만 아니라 서군에도 손길을 뻗쳤다는 것이지요. 참으로 당찬 여장부입니다. 그녀는 교토를 정리하기 위해서 하타케에먀 요시나리에게 고액의 돈을 빌려주고 귀국시키고, 마사히로에게는 종4위하 사쿄우다이부(左京大夫)를 제수하고 각종 직위를 부여합니다. 그렇게 해서 마사히로도 승전장군처럼 자신의 영지에 돌아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로써, 드디어 11년에 걸친 오닌의 란이 정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