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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에고타, 누마부코로 전투

일본 전국시대;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에고타, 누마부코로 전투



 분메이 9년(1477년)에 오오타 도칸(大田道灌)이 무사시(武蔵)지역의 유명한 토시마(豊島)형제를 멸한 에고타(江古田), 누마부코로(沼袋) 전투가 있었습니다. 



가마쿠라의 위치



 무로마치 막부는 관동에 거점이 있었으나, 남북조의 동란덕에 교토에서 막부를 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관동의 지배는 쇼군의 삼남 모토아지(基氏)가 가마쿠라쿠보(鎌倉公方)를이어 관동을 지배한다는 체재가 되어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가마쿠라는 독립국가의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때 가마쿠라쿠보의 오른팔인 관동 관령직은 우에스기가가 대대로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에이쿄 11년(1439년) 지나치게 독립을 지향하던 아시카가가(足利氏)에게 위협을 느낀 우에스기 노리자네(上杉憲実)는 쇼군과 자고 당시 당주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를 할복하게 합니다. 그 뒤, 그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足利成氏)는 코가쿠보(古河公方)를 자칭하고 관동에서 소요를 일으킵니다. 이에 관동 관령 우에스기가는 이 소요의 진압을 위해 나섰고, 관동은 전란에 빠져들게 됩니다. 



 우에스기에는 오우기가야쯔 우에스기가(扇谷上杉家)와 야마노우치우에스기가(山内上杉家)라는 두 큰 세력이 있었는데, 아마노우치우에스기가가 우에스기 가내의 세력으로, 종가였으며 세력도 더 컸습니다. 이 야마노우치우에스기가의 집사는 나가오가에서 맡았고, 오우기야쯔 우에스기가의 집사는 오오타 도칸이었습니다. 무사시(武蔵), 우에노(上野)의 수호대도 맡고 있던 나가오 카게노부(長尾景信)가 죽은 뒤에, 야마노우치우에스기가의 아키사다(顕定)가 그 후계로 장남인 나가오 가게하루(長尾景春)대신 그의 숙부 나가오 타다카게(長尾忠景)를 지명합니다. 당연히 가게하루는 격노했지요. 결국 그는 적대했던 코가쿠보의 지원을 받아 하치가타성(鉢形城)애서 거병합니다.



당시 상황도



 처음 도칸은 가게하루에게 동정적이었다고 합니다. 그도 집사의 위치이니 가게하루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겠지요. 게다가 후계분쟁에 간섭하는 것은 내정간섭으로 주군이라해도 쉽게 간섭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도칸은 우에스기가에 충성을 다하기 위해 가게하루와 적대하게 됩니다. 가게하루의 반란은 당시 우에스기에 불만을 품고있던 무사들을 모아 점차 세를 불려나갑니다. 여기에 긴급하게 대처한 것이 토시마 야스쯔네(豊島泰経), 토시마 야스아키(豊島泰明) 형제였습니다. 그들은 에도성, 가와고에성(河越城)등이 도칸의 제장들과 연락을 못하도록 샤쿠지이(石神井), 네리마(練馬)의 료조(両城)에서 농성작전을 펼칩니다. 게다가 도칸의 배후를 공격하도록 여러 영주를 포섭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제갈공명이라 구가해진 도칸은 이 난관을 가볍게 극복해 보입니다. 우선 남동생 야스아키가 지키는 히라츠카성(平塚城을 공격합니다. 적이 모습을 보이자 야스아키는 재빨리 형에게 연락하지요. 그러자 야스쯔네는 도칸이 나와 텅빈 에도성을 공격해야 겠다는 생각을 하고 샤쿠지이성에서 출격합니다. 도칸의 함정에 빠졌다고는 생각도 못한 채 말입니다. 오닌의 난을 이야기 하면서 최하급 무사인 잡병들에 대해 이야기 했었습니다(이나리야마 공방전). 이나리야마 공방전에서 이들의 이야기가 나왔었죠. 근데 이들을 훈련시켰던 것이 다름아니라 도칸이라고 합니다.(정사는 아닙니다.) 



나가오 가게하루의 난




 토시마 형제가 농성하던 성은 엄청 견고한 성이었는데, 이곳에서는 잡병들의 활약이 거의 없지요. 하지만, 평야에서 잡병들의 활약은 빛을 발합니다. 토시마 형제의 연합군을 본 도칸은 후퇴하는 척해 그들을 깊은 곳으로 유인합니다. 그리고 재빨리 반전해 양 군세는 부닥치게 되니, 이 전투를 에고타, 노마부코로 전투라고 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토시마의 군세는 200기, 도칸의 군세는 불과 50기 였지만, 도칸의 잡병들이 습격해 기병을 무효화하고, 수로 압도했다고 합니다. 토시마 야스아키는 이 전투에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그리고 형인 야스쯔네는 서둘러 샤쿠지이성으로 도망치지요. 하지만 재빠르게 쫓아온 도칸의 군세에 그는 항복을 청하게 됩니다. 도칸은 항복의 조건으로 성을 부수라고 하지요. 


 며칠이 지나도 성을 부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자, 도칸은 총공격을 개시하게 됩니다. 곧 열세에 몰린 야스아키는 가보인 황금의 말안장을 백마에 싫어 성벽의 바로 옆에 있던 벼랑에서 산보우지못(三宝寺池)에 뛰어 내립니다. 그것을 본 그의 딸 테루공주 역시 투신을 함으로서 토시마가는 멸망하게 됩니다. 그 후로 산보우지못에서는 이상한 빛이 발견이 되어, 그들을 기리는 사당을 지었다고 합니다. 지금도 테루 공주 축제라는 것을 한다고 하네요. 하지만, 정사에는 야스야키가 잘 탈출해 재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그 뒤로는 역사에 등장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