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국시대;
아마고가 쇠락의 시작 코오리야마성 공방전
텐몬10년(1541년) 모리가가 점거한 코오리야마성에 아마고가가 총공격을 개시해 코오리야마 공방전(郡山城 攻防戦)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닌의 대란으로부터 약 80년 전국은 군웅할거 시대의 한 중간이었습니다. 후에, 츄고쿠 지방 일대를 수중에 넣는 대영주가 되는 모리 모토나리도 이때는 아직 아키의 유력 쿠니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모리 모토나리 등장 아리타성 공방전) 게다가, 근처에는 이츠모를 지배하는 아마고가나, 스오우를 수습하는 오오우치가라고 하는 헤이안, 카마쿠라 부터의 명가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모리는 그들에게 종사하는 소영주였습니다. 처음에는 아마고가의 산하에 들어가고 있던 모토나리는 텐몬6년(1537년)에 선대의 아마코 쓰네히사(尼子経久)가 손자 하루히사(晴久)에 상속을 시킨 것을 계기로, 모토나리는 오오우치 요시타카의 산하로 몸을 옮깁니다.
코오리야마성(郡山城)
물론, 이 모토나리의 행동에 분개한 것은, 당주가 된지 얼마 안된 하루히사입니다. 아마고가와 오오우치가 종종, 패권을 둘러싸고 서로 부딪치고 있는 라이벌이었기 때문에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지요. 그래서 텐몬9년(1540년) 하루히사는 모리 토벌을 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합니다. 그러나, 이 때의 군세는 모토나리의 거점 성 코오리야마성의 강고한 방비를 깨지 못해 성을 공략하지 못하고 귀환합니다. 2개월 후 다시, 아마고가중에서도 용장으로 이름 높은 아마고 히사유키(尼子久幸)를 필두로 아마고가의 정예 부대 신구토우(新宮党)를 통솔하는 아마고 구니히사(尼子国久)와 그 아들 아마고 사네히사(尼子誠久)가 인솔하는 3만 대군을 편성해, 다시, 코오리야마성을 공격합니다.
당시 전황도
이에 대항하는 모토나리의 모리군은 불과 8천 게다가, 그 수안에는 정규군이 아닌 영주 지배하에 있는 백성도 포함되어 있었기때문에 코오리야마성은 일촉즉발의 위기에 빠졌습니다. 농성를 결의하는 모리군을 포위한 아마고군은, 성의 주변에 방화를 하고 난 뒤, 본격적으로 전면 공격을 개시합니다. 하지만, 이 대군이 총공격을 걸쳐도 불과 8천의 병사가 방비하는 성을 공략할 수 없다는 것은 아마고군에 있어서는 패배와 동일한 굴욕이었습니다. 그 뒤로도, 모리의 교묘한 방비에, 그대로 대치하던 중 이윽고, 12월에 오오우치가의 원군이 도착합니다. 모우리를 구하기 위해, 1만의 군사를 따르게 해 온 것은, 스에 타카후사(陶隆房)입니다. 그는, 후에 주군 오오우치 요시타카를 모살하고, 오오우치가를 자신의 것으로 하고 모토나리와도 굴지의 기습전 이쓰쿠시마 전투로 자웅을 결정하는 인연이 깊은 사람입니다.
코오리야마성 공방전
아침이 되어 텐몬10년(1541년) 대군을 인솔해도 점령할 수 없는 코오리야마성을 공격하다 지치고 있는 데다가 원군이 도착한 일도 있어 그 진영의 사기가 내리기 시작한 아마고군은 다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코오리야마성에 총공격을 감행합니다. 최초의 8천 때도 떨어뜨릴 수 없었던 성입니다. 하물며, 1만의 원군이 가세한 뒤이기 때문에, 그 공격이 잘 될리 없습니다. 개시하자마자 눈 깜짝할 순간에 총대장 히사유키가 전사하고. 그것을 본 쿠니히사, 사네히사 부자는 당황해서 철퇴를 개시해 어떻게든 간신히 이즈모로 도망갑니다. 하지만 패배한 아마고가는 엄청나게 큰 타격이을 입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오오우치나 아마고도 쇠퇴하는 가운데 이윽고 모토나리가 그 두각을 나타내 오는 일이 됩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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