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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문화편

일본 전국시대 종교편; 신의 가르침과는 다른 폭력성, 남만신교(크리스트교)

일본 전국시대 종교편;

신의 가르침과는 다른 폭력성, 남만신교(크리스트교)




기독교는 어떻게 일본에 쉽게 전파되었을까?



 중국 정토종의 경전 「무량수경」은, 불교를 의역하기 위해 도교의 언어들을 사용했습니다. 이것과 같은 것이 전국시대 기독교에서도 일어났습니다. 기독교의 다양한 언어를 불교, 도교언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 이해가 쉽기 때문이지요.



자비엘



 유명한 선교사 프란시스코 자비엘은 일본어를 할 수 없었습니다.  야지로(弥次郎)라고 하는 일본인이 자비엘의 통역을 했습니다. 야지로는 오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에게 자비엘을 천축의 고승으로 소개합니다. 야지로가 자비엘을 승려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가 신도와 불교 밖에 종교를 몰랐던 것이기도 하지만 불교와 기독교의 유사성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묵주와 염주, 찬미가와 독경, 라틴어의 경전과 범어의 경전, 신부의 설교와 승려의 설법 등 유사성은 매우 많았기에 불교의 한 종파라고 생각했습니다. 게다가 하느님을 대일여래(大日如来)라 번역했기에, 많은 이들은 당연히 불교의 종파로 받아들였습니다. 


 또한 도교와도 섞여 성모 마리아는 관음 마리아가 되어 일본인들에게 급속히 퍼집니다. 사실 성부나 성모라는 말도 유래는 도교입니다. 이렇게 해서 75만명 정도의 신자를 얻게 됩니다.




포교의 위험성



 선교사의 포교 목적은 그 나라에 기독교도를 늘려, 본국으로부터의 군대와 공투 시키는 것에 있습니다. 즉, 포교를 인정하는 것은 일시적인 무역의 이익을 얻는 것더라도, 최종적으로는 국내에 적대 세력을 형성하는 것에 연결됩니다.



기리사탄(切支丹)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기독교의 포교를 인정하지 않고 탄압을 실시했던 것과 에도 막부가 포교를 실시하지 않는다고 한 네델란드만 교역을 실시했던 것도 이 때문에입니다. 예수회는 프로테스탄트와의 대항 의식이 강해, 식민지로의 포교를 목적으로 결성되었습니다. 그 강고한 사상으로 인해 '예수의 군대'라고까지 불렸습니다. 그들은 국왕의 관심을 얻기 위해 무역에 협력하고, 종교로 현지 주민을 회유 했습니다. 스페인 선교사 등은 일본인 기리사탄(切支丹: 크리스천)을 결집시켜 크리스찬 영주의 영토, 최종적으로 일본을 군사기지로 하는 것으로 지나(支那: 중국)를 제압하려고 했습니다.


 덴쇼 13년(1586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의 예수회를 관할하는 가스파르 코엘요게 일본 통일은 눈 앞에 있으며 후에 조선이나 명도 제압할것을 밝혔습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게 지나(중국) 포교를 허가하는 대신 군선의 파견을 요청합니다. 코엘요는 그해, 일본을 카톨릭에 개종시켜 스페인의 지나 제압에 이용해야 한다는 서신을 필리핀에 보냈고 있었기에, 이를 안 히데요시의 계책일 것입니다.



성 페리호



 게이쵸 원년, 성 페리호가 토사 앞바다에서 좌초합니다. 이 배에는 3백명 가까운 흑인 노예가 타고 있었습니다. 마시타 나가모리(増田長盛)는 이 배를 가지려 하지만, 선원들은 격노해 스페인은 매우 대국이며 전세계에 퍼져있다며 이런 태도는 용납할 수 없다고 합니다. 게다가 필리핀 총독도 항의했지만, 히데요시는 '귀국은 포교를 하여 타국을 제압하였다고 한다. 일본인이 귀국에서 신도를 전파한다면 기뻐하겠는가? 성 페리호의 적하는 돌려주려 했으나, 반천련추방령(伴天連追放令)에 위반하기에 이쪽에서 처리하겠다. 이점에는 잘못이 없다. 귀국에서 죄를 지은 일본인이 있다면 귀국의 법대로 하라.'라고 했습니다.




남만신교의 위험성



 일본인 기리시탄은 일본의 전통을 찢어, 위화감과 위기감을 낳았습니다. 크리스찬 영주로 유명한 오오무라 스미타다는 마리지천상(魔利支天象)을 태워 버립니다. 루이스 프로이스는 「일본사」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전장으로 향하는 중간에 스미타다는 마리지천상을 보았다. 무장들은 마리지천을 군신으로 모셔 경의를 표했으나, 그는 부하에게 이 코끼리를 태워버리라 명했다. 절 전체를 다 태워버린 그는 십자가를 세워 경의를 표하고 전장으로 향했다.'


 자신이 남만신교(크리스트교)를 믿는 것은 상관없으나, 일본인들이 고래로 외경심을 가진 신들을 짖밟고 파괴한 이런 행위는 정치를 흔들지요. 히데요시가 기리시탄을 싫어하게 된 것은 이런 남만신교 특유의 배타성 때문일 것입니다. 게다가 스미타다는 나가사키를 예수회에 기부해 버렸는데, 덴쇼 16년에 히데요시는 나가사키를 공령으로 해 몰수해 버렸습니다.




선교사들의 어두운 측면, 노예 매매



 선교사는 노예 상인과 결탁해, 일본인을 해외에 수출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격노시켜, 반천련추방령에까지 발전했습니다. 선교사는 결코 포교에만 종사하는 평화적인 존재는 아닙니다. 그들은 일본인의 매매에 관여해, 히데요시는 그것을 멈추게 하기 위한 교섭을 실시하고 있었습니다.


 전국시대 전투의 뒤에는 포로의 매매가 일상적에 행해지고 있어 인신 매매도 성립하고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국내에서의 인신매매를 허락하지 않고, 중개인이나 선주를 책형에 처했습니다. 히데요시의 반천련추방령은 인신매매의 금지령을 외국인에게도 발포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히데요시의 통역인 로드리게스는 히데요시는 죽기 직전까지 포교에 관해서 이야기 할리가 없다고 했습니다.



신의 이름으로 노예를 판 것일까요?



 텐분에서 코우지 까지 주로 큐슈의 일본인, 특히 여성이 선교사에 의해서 해외에 팔렸습니다. 코우지 원년 (1555년), 마카오의 선교사 카르네이루(Carneiro)는, 많은 일본인이 포르투갈 상인에 팔려 마카오에 수출되고 있다고 편지에 기록했습니다. 이윽고, 선교사들은 인신매매가 일본의 포교를 방해한다고 판단해 포르투갈 국왕은 겐키 원년 (1570년), 포르투갈인이 일본인의 매매에 관련되는 것을 금지했습니다. 이에 일본인 노예의 해방과 거기에 반하는 사람의 전재산을 몰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회 자체는 인신매매를 허가하고 있었다.국왕의 발포한 법이여도 외국에서의 구속력은 약하고, 그 후도 일본인의 매매는 계속 되었습니다. 덴쇼 15년, 히데요시는 코엘요에게「5조의 힐문」을 보냅니다. 서양인이 일본인을 노예로서 매매해, 타국에 '수출'하고 있는 것에 격노를 표현했습니다. 이에 코엘요는 일본인이 노예를 팔기 때문에 산 것이 아니냐? 라 반론합니다. 이에 히데요시는 서양인의 노예 매매의 악습이 일본에 미친 것이라 비판합니다.


직후, 반천련추방령이 발포되었습니다. 동시에 히데요시는, 선교사에게 해외에 팔린 일본인을 즉시 귀국시키도록명하고 아직 일본의 항구에 있는 일본인 노예는 되사도록 명했습니다. 게이쵸 원년, 예수회는 노예 상인에의 파문을 의결 해 게이쵸2년, 인도부왕은 포르투갈 국왕의 명령으로 일본인 노예의 매매, 일본도의 수출을 금지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회도 일본인 매매 금지령을 냈지만, 따르는 포르투갈인은 적었습니다.



 사랑과 평화를 말하는 예수의 가르침으로 민중에게 평등사상을 퍼뜨려 자신의 편으로 하고,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노예로 만드는 폭력적인 크리스트교의 포교는 지탄받아야 마땅한 것이 아닐까요? 아무튼 남만신교는 여러 영주들과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유럽에 소년 사절단(유럽소년사절단)을 보낼 정도였으나, 그 위험성을 간파한 히데요시에 의해 금지당하고, 후에 도쿠가와 막부도 금지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