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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의 큐슈정벌(2) 시마즈의 선방, 토츠기가와 전투

일본 전국시대;

히데요시의 큐슈정벌(2)

시마즈의 선방, 토츠기가와 전투




 덴쇼 14년(1586년) 11월 25일, 드디어 큐슈를 제압하려고 움직이기 시작한 하시바 히데요시의 군과 그것을 저지하려고 하는 시마즈 이에히사가 츠루가성(鶴賀城) 근처의 토츠기가와(戸次川)에서 맞닥드려 토츠키가와 전투가 발발했습니다.


토츠키가와 전장



 미미가와 전투(미미가와 전투)의 승리 후에그 세력을 큐슈 전 국토에 넓힐 기세로 분고의 오오토모를 압박하는 사츠마의 시마즈, 이 압박에 의해 오오토모 소린은 덴쇼14년(1586년) 시코쿠를 평정 하고, 천하 통일을 눈 앞에 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부탁합니다. 한편 시마즈는 다테나와데 전투(다테나와테 전투)에서 류조지가를 무찌르며 세력을 불리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덴쇼 14년 7월에는 시마즈가 이와야성(이와야성 공방전)까지 정복해 버립니다. 히데요시는 시고쿠에서 5천의 군세를 파견하나, 사이가 좋지 않았던 대장들끼리 싸우다 결국 패배해 버립니다.


 덴쇼 13년(1585년)부터 시작된 시코쿠 정벌(모토치카, 히데요시에게 항복)에서 센고쿠 히데히사는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 쿠로다 요시타카(黒田孝高)와 함께 사누키 공격에 참전해, 그 때의 활약에 의해 사누키의 타카마츠 10만석이 주어졌습니다. 이 사이에 오오토모의 구원요청이 있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히데요시에게서 선봉을 명령받은 히데히사는 덴쇼 14년(1586년) 9월 18일 군감으로 분고, 후나이에 진을 쳤습니다. 군감은 '군'을 '감'독하는 지위를 말합니다.


 이 때, 그가 인솔하는 선봉군 외에 사누키 토라마루성 성주 소고우 마사야스(十河存保), 토사 오코우성(岡豊城) 성주 쵸쇼카베 모토치카도 군을 인솔해 참전한 했습니다. 이런 여러 군전체를 감시하고 통괄하는 역할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위의 두 명 마사야스와 모토치카의 감시입니다. 이 두 명은 얼마 전까지 시코쿠에서 싸우고 있던 적이었기 때문이지요. 원래 모토치카가 마사야스를 격퇴하고 내쫓았었습니다. 이에 마사야스는 히데요시의 수하로 들어가, 시고쿠 정벌에 참가해 옛 영토를 되찾았지요. 그래서 중개역으로 히데히사를 넣은 것이지만, 군감은 총사령관이 아니기에, 모든 작전은 세명이 논의해 전략을 정해야 했지요.


토츠키가와 전투 진행도


 논의는 진행되지 않다가 결국 히데히사가 두명의 의견을 무시하고 우선 츠루가성을 탈환을하는 단기 결전의 작전이 결정되어 이 날 그들은 토츠기가와의 하류에 진을 쳤습니다. 히데요시의 참전에 시마즈 이에히사는 몰래 성을 버리고 철퇴할 준비를 시작합니다. 다음 달의 12월 12일 밤 은밀하게 츠루가성을 나와 토츠기가와를 건너 철퇴를 개시하는 시마즈군은 곧 토츠기가와 근처에 포진하던 센고쿠대에 들키고 맙니다. 곧바로 센고쿠 히데히사는 추격합니다.



쵸쇼카베 노부치카



 하지만 이것은 사실 시마즈의 양동 작전이었습니다. 깊게 쫓아온 센고쿠대를 상류와 하류에 잠복하고 있던 시마즈의 복병이 등장해 세 방향에서 포위하고 공격합니다. 시마즈의 양동 작전에 완전하게 분단 되어 버린 시코쿠 정벌군은 초소카베 모토치카의 아들 노부치카(信親)가 사망하고 소고우 마사야스(十河存保)도 사망합니다. 시코쿠 일대에 그 이름을 떨친 쵸쇼카베 모토치카도 아들의 죽음에는 상당한 충격을 받아 이 전투의 뒤에는 맹장의 이름이 사라질 정도로 변화를 보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정작 센고쿠 히사히데는 전쟁이 한창 벌어지는 가운데 도망쳐 버립니다. 이에 히데요시는 그를 추방해 버리고 덴쇼 15년(1586년) 3월 스스로 남동생 도요토미 히데나가(豊臣秀長)와 함께 출진해 20만의 대군을 이끌고 큐슈에 도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