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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실패로 끝난 히데요시의 첫 큐슈 정벌

일본 전국시대;

실패로 끝난 히데요시의 첫 큐슈 정벌



 덴쇼 14년(1586년) 9월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를 하시바 히데요시의 시마즈 토벌군의 선봉의 군감(軍監)으로 분고, 후나이에 진을 쳤습니다.



센고쿠 히데히사



 미미가와 전투(미미가와 전투)의 승리 후에그 세력을 큐슈 전 국토에 넓힐 기세로 분고의 오오토모를 압박하는 사츠마의 시마즈, 이 압박에 의해 오오토모 소린은 덴쇼14년(1586년) 시코쿠를 평정 하고, 천하 통일을 눈 앞에 둔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원군을 부탁합니다. 이 때 히데요시의 명령을 받아 선봉으로 큐슈에 달려든 이가 사누키의 타카마츠성(高松城)의 센고쿠 히데히사였습니다.  히데요시에게서 선봉을 명령받은 히데히사는 덴쇼 14년(1586년) 9월 18일 군감으로 분고, 후나이에 진을 쳤습니다. 군감은 '군'을 '감'독하는 지위를 말합니다.


이 때, 그가 인솔하는 선봉군 외에 사누키 토라마루성 성주 소고우 마사야스(十河存保), 토사 오코우성(岡豊城) 성주 쵸쇼카베 모토치카도 군을 인솔해 참전한 했습니다. 이런 여러 군전체를 감시하고 통괄하는 역할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위의 두 명 마사야스와 모토치카의 감시입니다. 이 두 명은 얼마 전까지 시코쿠에서 싸우고 있던 적이었기 때문이지요. 원래 모토치카가 마사야스를 격퇴하고 내쫓았었습니다. 이에 마사야스는 히데요시의 수하로 들어가, 시고쿠 정벌에 참가해 옛 영토를 되찾았지요. 그래서 중개역으로 히데히사를 넣은 것이지만, 군감은 총사령관이 아니기에, 모든 작전은 세명이 논의해 전략을 정해야 했지요.



쵸쇼카베 모토치카


소고 마사야스


이 원수들을 붙여 놓다니 지못미 ㅜㅜ



 이 상태로 11월 25일 토츠기가와 전투에서 오오토모의 군을 가세해도 1만 정도인 히데요시군에, 2만 5,000의 군세를 이끄는 시마즈가, 그렇지 않아도 수가 뒤떨어지는데 의견을 통일하지 못하고 삐걱거린 채로 개전했기 때문에, 예상대로 대패를 당해 버립니다. 게다가 마사야스와 모토치카의 장남 노부치카(信親)마저 전사 한다고 하는 큰 희생을 낸 뒤, 자신은 전장에서 빠르게 도망친다고 하는 대실태를 보여 버립니다. 이것에 격노한 히데요시는 히데히사의 영지를 몰수하고 코노야마로 추방해 버립니다. 보통 여기서 할복으로 목숨을 끊었겠지만, 히데히사는 굴하지 않습니다.


 얼마 뒤 히데요시가 시마즈를 굴복 시키고 마지막으로 남은 거물 호조의 오다와라성(小田原城)을 둘러싼 일을 알자, 히데히사는 20명 남짓의 가신을 인솔해 이에야스의 진을 빌려 참전합니다. 히데히사는 이 전투에서 최전선에 서서 무참히 적을 베어 아군과 적군의 주목을 모으고, 오다와라성 성문을 점령한다는 엄청난 공을 세웁니다. 20명 남짓의 무사들의 분전은 지금봐도 매우 충격적인 퍼포먼스이지요. 히데요시는 이에 감동해 시나노 코모로(小諸) 5만석을 다스리는 영주가 됩니다. 그 뒤로 임진왜란이나 후시미성 건축에서도 공을 세우지요. 결국, 히데요시 사후에 이야에스로 또 갈아타 에도시대에 초대 코모로 영주가 됩니다. 그의 미꾸라지 같은 처세술과 포기를 모르는 삶의 모습은 배울 점이 있을 지도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