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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전국시대/역사편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1) 오오토모군 타가성 공격 개시

일본 전국시대;

미미가와 전투(1) 오오토모군 타가성 공격 개시



 덴쇼 6년(1578년) 분고의 전국 다이묘 오오토모 소린이, 타와라 치카카타(田原紹忍)을 총대장에게 임명해 휴우가 타카키 공격을 개시했습니다.


 덴쇼 5년(1577년)의 기자키가하라 전투로 인해 사츠마의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대패를 당해, 휴우가의 남쪽을 빼앗긴 이토 요시스케(伊東義祐)가 구원을 요청해, 시마즈와의 항전을 결의한 분고의 전국 다이묘 오오토모 소린은  휴우가의 땅 일부 양도를 약속받아, 크리스찬의 이상향 뮤지카를 지으려 했습니다. 이전의 부인과 이혼하고 크리스천인 새부인 쥴리아를 맞이해 본인도 돈 프란시스코로 개명해, 아들에게 다이묘 자리를 주고 출진합니다. 소린은 3만 5천의 군세를 해로로 이끌어 용이하게 후유가로 진출해 뮤지카를 건설했습니만, 별동대로 출진한 중신 타와라 치카카타가 인솔하는 2만의 군세가 육로에서 남하해, 시마즈와의 세력 경계선인 미미가와를 건너 시마즈가의 영지 타카성(高城)로 진군했습니다.


미미가와를 넘은 오오토모군


 덴쇼 6년(1578년) 근처의 민가에 방화한 후 타카성를 포위한 오오토모군은 엄청난 실수를 저지릅니다. 타카성를 맡고 있던 시마즈의 가신 야마다 아리노부(山田有信)의 군세는, 기껐해야 500이었습니다. 타카성는 천연의 요충지에 둘러싸여 있는 요충지였지만, 여기까지 수가 차이나면 공격했으면 용이하게 함락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리노부가 전령을 파견해 이 소식을 들은 사도하라성(佐土原城)의 시마즈 이에히사(島津家久: 요시히사의 막내 아우)가, 서둘러 군사를 인솔해 타카성에 들어가 버립니다. 게다가 시마즈 세력의 여러 성에서 구원군도 받은 타카성의 성병은 어느새 3,000 에 육박했습니다. 포위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지원군의 입성을 내버려 둔 것입니다.


쿠니즈시(国崩)


 작은 전투에서 승리는 했지만, 큰 승리는 못거두는 데다가 오오토모측 최대의 무기인 대포 쿠니즈시(国崩)는 거리가 너무 멀어서 타카성에 이르지 않아 효과가 없었습니다. 오오토모군은 장기전을 고려하고 포위를 강화합니다. 그러면 농성 하는 측에 가장 큰 문제는 자금의 부족입니다. 잠시 뒤에 타카성 내는 물부족이 되어, 강에 물을 길으러 가려고 해도 강화된 포위망에 의해 불가능한 상태였지요. 시마즈군이 항복을 고려한 때에, 성의 흙벽아래에 물이 배어 나와 있는 것을 한 명의 성병이 발견해 그 자리를 파 보자 물이 솟아 나와 성내의 사기는 높아졌습니다. 이러는 도중에 가고시마에 있던 시마즈의 당주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가 3만의 군세를 인솔해 출진합니다. 


시마즈 요시히사


 그 행군의 도중 , 요시히사는 어떤 꿈을 꿉니다. 그 꿈 속에서 키리시마 신사의 신불의 사자라고 칭하는 노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진 단자쿠(短冊: 짧은 말이 쓰여진 종이)를 받았다고 합니다.


討つ敵は 龍田の河の 紅葉かな

토벌하는 적은 타츠타 강의 단풍일까


 이에 기세등등해진 요시히사는 그 구를 따라 키리시마 신사에 봉납하고 전장으로 향했다고합니다. 이 무렵에는, 각지로부터의 원군을 포함해 시마즈군은 총원 5만에 달했다고 합니다. 한편, 오오토모군도 서서히 군세를 증강해 6만이 모였으니, 이제 충돌은 목전에 다가와 있었습니다.